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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4. 1. 28, 스위스 바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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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2. 3. 24, 로잔 |
국적 | 스위스/벨기에 |
요약 스위스 태생 벨기에의 물리학자.
상부 성층권과 그가 직접 설계한 배에서 바다의 깊이를 측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1930년 우주선(宇宙線)을 연구하기 위해 기구(氣球)를 제작했다. 1932년 기구에 사용할 새로운 기실(機室)을 설계했고 같은 해에 1만 6,916m까지 올라갔다. 1948년 심해탐구선을 완성했고 후에 아들 자크와 함께 몇 차례 잠수를 했다.
그는 스위스의 학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줄 피카르는 바젤대학교의 화학교수였다. 그는 쌍둥이인 형 장과 함께 취리히의 스위스연방공과대학에 들어가 각각 물리학과 화학을 공부했다. 그들이 과학박사가 되었을 때 둘 다 대학에서 가르치기로 결심했는데, 화학자인 장은 처음에 뮌헨으로, 다음에는 로잔으로, 그뒤에는 미국으로 갔다. 물리학자인 그는 연방공과대학에 머물렀다. 1919년 그는 소르본의 한 프랑스 사학자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실험 수단으로 기구를 띄우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많은 중요한 연구에 참여했고 1922년 브뤼셀대학교에 응용물리학 강좌를 신설했을 때 정비사이자 기술자이기도 했던 그는 기꺼이 그 직위를 받아들였다. 그는 우주선을 연구하면서 상층 대기 1만 6,000m 이상의 높이에서 그것을 관측하는 실험에 대해 생각했다. 이전의 기구여행을 통해 성층권이 치명적이며 기압이 낮은 등온층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혁신적인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그는 벨기에의 재정지원으로 1930년 그러한 기구를 제작했다.
그것의 중요한 혁신적 특성은 여압공기가 장치된 밀폐기실이었는데, 오늘날 이 기법은 흔히 비행기에서 사용되고 있다. 또다른 혁신은 출발시에 완전히 채워질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한 상승력을 가진 큰 기구를 설계한 것이었다. 1931년 5월 27일 그와 P. 키퍼는 대기압이 해면에서의 1/10밖에 안 되는 1만 5,781m 고도까지 올라갔다.
지상으로 돌아왔을 때 이들은 취리히와 브뤼셀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1932년에는 라디오가 장치된 새로운 기실을 타고 1만 6,940m의 고도에 도달했다. 1933년 소련과 미국에서도 같은 기법을 사용했는데 더 큰 기구를 타고 각각 1만 8,500m, 1만 8,665m까지 올라갔다.
어린시절 그는 해양 어류에 대해 매료되었고 인간도 깊은 해저에 내려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구 비행에 성공한 뒤 그는 바다 깊은 곳의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심해탐구선을 만들고 싶어했다. 깊은 곳에서도 견딜 수 있는 선실은 반드시 물보다 무겁다. 1948년경 당시까지는 선실이 케이블에 매달려 있었으나 매우 깊은 곳에서는 이러한 과정들이 효과가 없었다. 피카르는 기구의 원리를 이용해서 잠수에 대한 대변혁을 일으켰다. 공기보다 가벼운 기구가 기구 곤돌라를 운반하듯이, 물보다 비중이 작은 부양체(浮揚體)가 선실을 지탱할 수 있다.
기구가 떠오르기 위해서는 밸러스트를 내버려야 하듯이 심해탐구선이 잠수를 끝내고 떠오르기 위해서는 무게를 줄여야 한다. 공기는 너무 쉽게 압축되기 때문에 부양체에 사용할 수 없어 그는 가솔린을 선택했다. 심해탐구선의 제작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중지되어 1948년에야 완성되었다. 1948년 10월 심해탐구선 F.N.R.S. 2호의 무인 시범잠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선실은 1,400m의 압력을 완벽하게 견디어냈으나 부주는 잠수 후에 큰 파도를 만나 심하게 손상되었다. 심해탐구선 계획은 후에 그의 아들 자크 피카르가 참여할 때까지 계속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제네바대학교의 경제학 조교였던 자크는 이미 프랑스 정부와의 협상을 이끌었다.
그뒤 트리에스테호에서 항구에 대한 연구를 준비할 목적으로 머물던 중 그 시의 지방산업체로부터 새로운 심해탐구선을 제작하자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1953년 8월 프랑스의 툴롱과 나폴리에서 2대의 심해탐구선이 완성되었다. 프랑스 선박 F.N.R.S. 3호는 2,100m까지, 피카르의 트리에스테호는 3,150m까지 내려갔다. 69세에 피카르는 자신의 꿈을 실현했다. 자크는 경제학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고 후에 공동으로 심해탐구선을 연구했다.
1954년 그는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브뤼셀을 떠나 스위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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