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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다른 표기 언어 Pietro della Vigna
요약 테이블
출생 1190경, 시칠리아 왕국 캄파니아 카푸아
사망 1249, 피사(?)
국적 신성 로마

요약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측근 신하.
Petrus de Vinea라고도 함.

법학자·시인·문필가로 유명하다. 그의 갑작스러운 실각과 비극적인 죽음은 단테를 비롯한 시인과 역사가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시칠리아 왕국의 이탈리아 본토 지역에서 가난한 집안(부모는 둘 다 거지였다고 함)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볼로냐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는데, 그 도시에서 학비를 대준 것으로 보인다.

1221년에 팔레르모의 대주교는 그를 프리드리히 황제에게 소개했고, 황제는 그를 궁정 공증인으로 임명했다. 1225~34년에는 시칠리아의 마그나 쿠리아(대법원)에서 판사로 일하면서, 노르만 법을 체계화하고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새로운 절대주의를 추가한 법전인 멜피 헌법(1231)의 주요입안자가 되었다. 이 법전은 우아한 라틴어 문체로 씌어졌고, 이 문체는 그에게 명성을 안겨주었다.

피에트로는 수사학적인 '아르스 딕타미니스'(작문술)의 대표적 인물로서 프리드리히의 편지와 공문서의 문체에 영향을 주었고, 이를 통해 유럽 궁정들의 수사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 시인으로서 '돌체 스틸 누오보'(감미롭고 새로운 문체)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1230년부터 피에트로는 프리드리히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이자 가장 신임받는 대사가 되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와 인노켄티우스 4세에게 여러 번 파견되었고, 1234년에는 프리드리히와 헨리 3세의 누이인 이자벨라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잉글랜드로 갔다. 황제의 모든 중요한 통치 행위에 협력자로 참여한 피에트로는 1246년 시칠리아 왕국의 수석 서기관(법원의 최고위관리) 겸 로고테테(총리)로 임명되어 그의 권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249년에 피에트로는 황제를 독살할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고발되었다.

크레모나에서 체포된 그는 사슬에 묶여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끌려다니다가, 결국 피렌체 근처 산미니아토에서 눈알이 뽑혀 장님이 되었다. 그가 산미니아토에서 상처 때문에 죽었는지, 아니면 피사 근처에서 자살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단테에 따르면, 그의 죄는 "프리드리히의 마음을 여는 2가지 열쇠를 모두 갖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의 범죄에 관한 문제는 동시대 작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들 대부분이 그의 죄를 사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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