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841년 1월 25일,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
---|---|
사망 | 1920년 7월 10일, 런던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해군제독.
1904~10년 해군본부위원회의 제1군사위원(다른 나라의 해군참모총장에 해당)을 지내면서 제1차 세계대전중에 영국 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 13세의 나이로 해군에 입대한 그는 수습사관으로 크림 전쟁에 참가했고, 1859~60년에는 중국에서 광둥[廣東] 함락전에 참가했다. 1874년 해군대령으로 승진한 후 함정의 지휘관과 포술 학교의 교장직을 역임했고, 1882년의 알렉산드리아 포격전에서는 전함 '인플렉시블호'의 부함장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피셔는 해군의 화기와 어뢰의 감독관직을 5년간 맡았으며, 1892년에는 해군본부위원회의 제3군사위원 겸 해군감으로 임명되어 해군의 물자확보 책임을 맡았다.
1894년 기사작위를 받고 1902년 제2군사위원, 1904년 제1군사위원이 되었다. 제1군사위원으로 재직할 동안 피셔는 함대 편제의 혁신, 해군공창의 운영, 군함의 건조, 잠수함의 개발, 해군 함정의 동력을 석탄에서 석유로 개조하는 작업, 포술 개발 등을 주관했다. 독일 해군의 급속한 확장에 대처하기 위해 국내 수역의 해군 병력을 보강하고 노후한 배들을 폐기 처분하여 남는 승무원들을 예비 함정들의 핵심 승무원으로 배치했다. 그는 대형 전함 '드레드노트호'(Dreadnought)의 건조도 추진했는데, 이 전함은 '완전 주포함'의 원형으로 군함 건조에 혁신을 일으켰고 독일에 의해 즉각 모방되었다. 독일 해군과의 경쟁이 치열해졌을 때 피셔는 영국 정부를 설득해 8척의 새 전함 건조를 시작하게 했다. 그는 또한 전투 순양함들도 만들어냈는데, 이 함종(艦種)은 중무장을 했지만 방어는 매우 빠른 속도에 의존했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독일의 중장갑 전투 순양함들보다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1909년 킬버스톤의 피셔 남작으로 봉작된 그는 1910년 1월에 현역에서 물러나 1914년 10월까지 예편 상태로 있다가 제1군사위원으로 소환되어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칠레 앞바다의 크로넬 해전에서 영국의 1개 전대가 독일의 그라프 폰 슈페 제독이 지휘하는 해군에게 패한 후, 피셔는 전투 순양함 '인빈시블'과 '인플렉시블'을 보내 포클랜드 제도 해전(1914. 12. 8)에서 슈페가 지휘하는 전대를 격멸했다. 피셔의 직업군인 생활은 처칠이 승인한 해군의 다르다넬스 해협 원정에 대한 애매한 태도로 인해 끝났다. 그 원정은 군대를 상륙시켜 터키의 수도를 공략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다르다넬스 해협의 전투가 지지부진하자 피셔는 그 전투를 포기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그의 견해가 영국의 지도층으로부터 전면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자 1915년 5월 15일자로 처칠 해군장관의 지도방침에 따를 수 없다면서 사임했다. 그는 사임 후 2권으로 된 회고록 〈회상과 기록 Memories and Records〉을 집필하여 1919년에 출판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존 아버스노트 피셔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