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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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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91. 12. 2, 아일랜드 킬케니 팜리 |
국적 | 아일랜드 |
요약 영국계 아일랜드인 정치가.
1782년 아일랜드에 입법상 독립을 부여할 것을 대영제국에 요구한 운동의 발기인이었다. 아일랜드 왕좌법원(King's Bench) 재판장 워든 플러드의 서자로, 1759년 아일랜드 의회에 진출했다. 탁월한 웅변술로 곧 단기의회의 구성과 아일랜드 전국 민병대의 창설을 요구하는, 소규모이지만 영향력이 큰 단체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이들의 원대한 목표는 입법상의 독립이었다. 1768년 플러드 주변의 애국지사들은 의회의 회기를 8년으로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1769년과 1771년에는 아일랜드에서 영국 행정부의 기금을 허용하는 법안의 입법을 저지했다.
그는 독립 아일랜드 최초의 정치가라는 위치를 포기하고 1775년 아일랜드 부왕인 하커트 경 밑에서 부재무장관직을 맡았다. 플러드보다도 더 뛰어난 웅변가였던 헨리 그래튼이 플러드를 대신해 애국파의 지도자가 되었다(그래튼은 플러드를 가리켜 "입에는 멋진 웅변을, 주머니에는 뇌물을 갖고 있는 자"라고 묘사했음). 그렇지만 플러드가 애국파를 떠난 시기는 적절하지 않았다. 애국파의 운동은 영국에 대항해서 반란(1775~83)을 일으킨 북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의 영향을 받아 더욱더 많은 아일랜드인이 참가함으로써 급속히 확산되었다. 1779년 플러드는 옛 정당에 다시 들어갔고 2년 후에 정부관직에서 공식적으로 해임되었다. 많은 추종자들을 잃은 상태에서도 그래튼을 도와 아일랜드 무역제한법을 포기하고(1779) 아일랜드에 입법상 독립(1782)을 허용하도록 영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그후 그래튼의 지도자 자리에 도전하기로 결심한 그는 그래튼의 개혁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면서, 영국의회가 아일랜드의 입법 통제권에 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플러드의 명성은 1784년 아일랜드 의회를 개혁하려는 시도가 실패하자 다시 실추되었다. 그는 1783년부터 1790년 은퇴할 때까지 영국의회와 아일랜드 의회의 의원을 지냈으나, 영국에서는 아일랜드 의회에서 거둔 만큼의 정치적 성공을 이룩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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