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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60, 투르크 니코메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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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310경, 콘스탄티노플 |
국적 | 터키 |
요약
그리스 정교회 소속 인문주의 학자이며 인류학자.
본명은 Manuel Planudes.
비잔틴과 로마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 참가한 신학 논객이기도 하다.
그가 그리스어로 번역한 고전 라틴 철학서와 문학서, 그리고 아라비아 수학책은 이 학문 분야를 그리스 비잔틴 문화권 전역에 널리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정치생활을 시작했으나, 파벌 투쟁 때문에 1283년 일선에서 물러나 수도원에 은둔했다. 그뒤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교황 아타나시우스 1세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신도를 위한 수도원을 창설하는 한편 황실 도서관 옆에 학교를 개설했다. 이 학교는 왕족·귀족 출신을 학생으로 받아들였으며, 철저하게 고전 인문학 위주의 교과과정으로 학문적 평판이 높았다.
플라누데스의 명성은 주로 서구의 콘스탄티노플 점령(1204~61) 때 그가 익힌 뛰어난 라틴어 실력 때문이었다. 이 언어 능력 때문에 1295~96년 안드로니쿠스 2세 팔라이올로구스 황제의 베니스 밀사로 발탁되기도 했다.
신학 저서 가운데 유명한 것은 〈성령의 발현 De processione Spiritus Sancti〉(1281경)이다. 이 첫 소책자에서 그는 성령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설을 지지했다. 그러나 선왕의 서구 지향정책을 철회한 황제 안드로니쿠스 2세가 즉위한(1282) 후에 쓴 2번째 책자 〈가톨릭 교리에 반대하는 성령론 Tractatus de Spiritu Sancto adversus Latinos〉은 첫번째 글과 뚜렷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정치 분위기의 변화를 좇아 플라누데스는 성령을 성부·성자와 연결하는 라틴 삼위일체설을 떠나 성령이 성부로부터 발현한다는 전통 비잔틴 교리로 옮아갔다. 결국 이 두 저서는 교황 요한네스의 친(親)라틴 태도를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모두에게, 나아가 150년 뒤에는 요한네스 베사리온과 게오르기우스 게미스투스 플레톤과 같은 비잔틴의 신학적 반대자들에게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플라누데스가 그리스어로 번역한 라틴 저서들로는 5세기의 교부(敎父)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삼위일체론 De Trinitate〉과 6세기의 철학자·정치가 보이티우스가 쓴 논리학·신학 논문들이 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번역물로는 키케로의 수상문과 수사학 외에 오비드의 시가 있다.
플라누데스가 그리스 문헌사에 남긴 두드러진 공헌은 유명한 〈그리스 사화집 Anthologia Hellēnikē〉에 대한 개정 작업이었다.
이 책은 BC 700년경부터 AD 1000년 사이에 활동한 그리스 작가들의 산문과 운문이 망라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11세기의 작품들이 다채롭게 편집되어 있다. 비록 재편집된 내용의 일부가 플라누데스 개인의 해석에 따르는 것이지만, 〈그리스 사화집〉은 거의 2,000년에 걸친 그리스 문학의 연속성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15세기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침으로써 근대 이탈리아·프랑스 문학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 〈이솝의 생애와 우화 Life and Fables of Aesop〉에 대한 개정, BC 3세기에 그리스 전원시를 창시한 테오크리토스에 대한 해설도 이 방면의 문학을 유럽에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비잔틴과 그뒤 유럽에서 수학의 발전은 플라누데스가 쓴 〈아라비아의 수학 Psephophoria kat' Indous〉에 힘입은 바 크다. 또한 바그다드 학파의 영향을 받아 영(零)의 기호를 포함한 아라비아 숫자 표기법을 권장했으며 그밖에 여러 가지 수학 계산법(예를 들면 제곱근 풀이)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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