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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틀란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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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나폴레옹이 1807년 2월에 벌어졌던 아일라우의 패전을 설욕한 전투(1807. 6. 14).

이 전투가 끝나고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틸지트 조약을 체결했다(→ 나폴레옹 전쟁). 전투는 오스트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 시에서 동남쪽으로 43㎞ 떨어진 프리틀란트(지금의 러시아 프라브딘스크)에서 벌어졌다.

약 8만 명 규모의 나폴레옹 대군(폴란드·네덜란드·이탈리아·독일 부대 포함)이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 장군 휘하의 러시아군 약 5만 8,000명과 대치했다. 러시아 병력 대부분은 프리틀란트에서 알레 강의 서안으로 건너가 6월 14일 새벽에 고립된 듯이 보이는 장 란 원수 휘하의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거의 2 : 1 이상의 병력 열세에 놓인 란 원수는 P. I. 바그라티온 공이 지휘하는 러시아군을 맞아, 나폴레옹이 병력을 집결시키는 동안 9시간이나 버텼다. 오후 5시경 나폴레옹은 약 6만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주공격을 감행했으며, 2시간 후 러시아군의 남쪽 절반을 프리틀란트라는 조그만 마을로 몰아넣었다.

마을에 밀집된 러시아군은 근처에 있던 프랑스군 대포에서 쏘아대는 포탄 세례를 받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군은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거나, 아니면 프랑스군이 이미 다리를 끊어놓은 강물에 휩쓸려 죽었다. 러시아군은 약 1만 9,000명, 프랑스군은 약 9,000명의 병력손실을 입었다. 베니히센의 부대는 산산조각이 났으며, 다음날 동맹군인 프로이센의 안톤 레스토크 장군은 약 2만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쾨니히스베르크를 포기한 채 틸지트로 퇴각했고 프랑스군은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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