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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코발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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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피렌체의 경제 및 정치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중세의 은행가 가문.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2세의 전쟁을 지원했다.

12세기부터 피렌체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프레스코발디가는 오늘날까지 가문의 이름이 피렌체의 거리 하나를 온통 차지한 부유한 가문이었다. 1290년대에 백파(白派)와 흑파(黑派)로 가문이 분열되었는데, 각각 기벨린(황제파)과 구엘프(교황파)와 동맹을 맺은 피렌체의 파벌을 대표했다. 14세기초에는 단지 백파(기벨린) 프레스코발디 가문만이 살아 남았다. 보수주의자들인 백파는 1285~1433년에 정부의 요직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 1270년대 잉글랜드에 지점을 개설한 프레스코발디사는 20여 년만에 왕실에 대한 대부업자의 지위로 부상했다. 그전에 이러한 역할을 맡은 것은 루카의 리카르디회사였는데, 이 회사는 웨일스와 프랑스에서의 에드위드 1세의 전쟁을 지원하다가 파산했다.

1302~1310년에 프레스코발디가는 에드워드 1세와 2세에게 15만 파운드를 대부해주었다. 그 대가로 조폐 및 관세를 포함해서 잉글랜드 세입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부여받았으며, 토지와 작위와 특권을 받았다. 1310년 에드워드 2세 주변의 귀족들은 이탈리아인들의 역량을 시기하여 외국인에게 관세 할당을 금지하고 외국 상인의 체포 및 그들 재산의 몰수를 요구하는 법령을 기초했다. 이 법령이 시행되기 전에 프레스코발디가는 대륙으로 피신해 처음에는 아비뇽, 그 다음에는 피렌체에 은신처를 마련했다.

1343년 피렌체 유력가들이 일으킨 반란에 적극 가담했으나 실패로 끝나 피렌체 민주정부가 다시 들어선 다음에는 정부 요직에서 배제되었다. 이 가문은 몇몇 문학가들도 배출했다. 그중에서 시인 디노 프레스코발디(1316경 죽음)와 레오나르도 프레스코발디가 유명하다. 레오나르도는 1384년 이집트와 성지(聖地)를 방문하고 그 나라의 사회·경제 생활에 관해 귀중한 사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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