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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96. 5. 4, 미국 매사추세츠 세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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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59. 1. 28, 보스턴 |
국적 | 미국 |
요약 미국의 역사가.
저서 〈멕시코 정복사 History of the Conquest of Mexico〉(3권, 1843)·〈페루 정복사 History of the Conquest of Peru〉(2권, 1847)로 가장 유명하다.
미국 최초의 과학적인 역사가로 알려져 있다(역사편찬).
그는 전통적인 뉴잉글랜드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예수회 수사 존 가드너가 이끌던 대학진학 예비학교에서 3년 동안 엄격한 교육을 받았는데, 가드너는 그에게 고전에 대한 애착심을 불어넣어주었다. 1811년 하버드대학교에 들어갔으며 하버드에서의 학업성적은 좋은 편이었으나 뛰어난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수학을 상당히 못했는데 이 때문에 나중에 멕시코 원주민의 수학적 업적을 연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3학년이 끝날 무렵 학생식당에서 난투극이 일어났을 때 빵껍질에 맞아 왼쪽 시력을 거의 잃었는데, 감염에 의해 오른쪽 눈도 약해졌기 때문에 때때로 저술작업에 애로를 느꼈다. 전생애에 걸쳐 그의 시력은 양호한 상태에서 완전한 실명상태로 바뀐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녹토그래프라는 기구에 의존했는데, 이 기구는 화학적으로 처리된 표면 위에 첨필로 유도된 평행철사들로 이루어진 필기용 석쇠였다.
그의 책과 서신의 상당부분은 이 장치에 의존하여 씌어졌다. 1814년 하버드를 졸업한 뒤 관절이 늘어나고 다리는 짧아지는 류머티즘을 겪으면서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는 아조레스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서 건강을 회복한 뒤 자신감을 갖고 유럽을 여행했다. 보스턴으로 돌아온 뒤에는 사업이나 법률관계 직업을 피하고 역사를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허약한 건강과 시력으로는 강한 체력이 필요한 사업이나 법률관계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820년 수전 에이모리와 결혼했다. 확실한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보스턴 친구들 사이에서는 '신사'로 알려졌다.
그의 아내와 독자들은 그의 눈이 되어 저술활동을 도왔다.
그의 첫 출판물은 〈노스아메리카 리뷰 North American Review〉(1821)에 실린 여러 논평과 소론이었다. 이 가운데 몇 편은 〈전기적·비판적 논집 Biographical and Critical Miscellanies〉(1845)에 재수록되었다. 제어리드 스파크스의 〈미국 전기 총서 Library of American Biography〉에 실린 논문 〈찰스 브록든 브라운의 생애 Life of Charles Brockden Brown〉(1834)에서 프레스콧은 작가로서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친구이며 스승인 작가 조지 티크너의 충고와 작가 워싱턴 어빙의 권유로 프레스콧은 평생작업의 주제를 스페인으로 돌렸다. 1838년에 출판한 그의 3권짜리 저서 〈가톨릭교도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통치사 Hist ory of the Reign of Ferdinand and Isabella the Catholic〉는 10년에 걸친 작업의 결과로서 보스턴 문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으로 그는 16세기 스페인과 스페인 식민지에 대한 전문 역사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다른 저서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통치사 A History of the Reign of Philip the Second, King of Spain〉(3권, 1855~58)는 스페인의 군사·외교·정치의 역사에 관한 권위 있는 저서로 당시에 나온 어떤 책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 씌어진 작품이다. 그러나 그가 오늘날에도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방대한 〈멕시코 정복사〉·〈페루 정복사〉 덕분이다. 그는 자신이 소장한 5,000여 권의 장서와 원문 자료를 엄격하게 이용했다.
그는 사료를 비판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미국 최초의 과학적 역사가로 불린다.
프레스콧에 대한 평가
프레스콧의 역사는 100년이 넘게 비판받아왔으나 학자와 독자의 계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이후 연구의 진척으로 16세기 스페인 군주제에 대한 그의 관점이 수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작업은 아직까지도 정당하고 정확한 것으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그는 스페인과 아스텍·잉카 같은 원주민 정부의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자신의 공화주의 시각을 역사에 도입했는데, 당시의 스페인 정복을 서술하는 데도 이런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또 뉴잉글랜드 유니테리언주의로 인해 그는 그 옛날 사람들도 기적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측면을 받아들였음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정복자들의 특성도 잘 알지 못했다.
〈멕시코 정복사〉·〈페루 정복사〉에 대한 가장 신랄한 혹평은 프레스콧이 원주민의 문명을 낭만적으로 설명했다는 점이었다. 프레스콧의 시각은 나중에 진행된 고고학·인류학에서의 연구결과물들로 왜곡된 것임이 밝혀졌다. 그는 자신이 서술한 역사적 무대를 방문하지 않았고 자신이 묘사한 원주민 문화의 실제 유적을 조사하지 않았는데, 이 점은 부분적으로 오류를 낳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스페인 연대기에 바탕을 둔 프레스콧의 역사서술이 본질적으로는 근거 있는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프레스콧은 역사를 통해 독자에게 교훈과 즐거움을 주기를 원했다. 그의 역사는 철학적이고 분석적이기보다 서술적이고 설명적이었으며, 그의 다채로운 산문은 문화·사회·경제를 주제로 삼지 않고 정복·전쟁·외교·정치를 다루었다. 스페인 역사를 보는 그의 시각은 전적으로 스페인 궁정과 귀족들에게 있었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역사가이며 문학예술가로서 프레스콧의 업적은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멕시코 정복사〉가 10개 국어로 적어도 200판이 넘게 출판되었고, 〈페루 정복사〉가 11개 국어로 160판이 넘게 출판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이 책은 아직까지도 독자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는 스페인의 시각에서 역사를 표현하여 라틴아메리카 세계 밖에서도 널리 독자를 확보했던 최초의 영어권 역사가였다. 프레스콧의 역사서에 나오는 스페인인들은 진보를 가져다준 선구자로 그려졌다. 그러므로 스페인의 무어인 및 멕시코와 페루의 원주민들은 스페인인들의 성격을 그렇게 규정하는 것에 일익을 담당했다. 프레스콧은 정복자를 저술함으로써 스페인 문화의 물결이 야만세계를 완전히 압도하는 광경·전투·행군 등을 생생하게 독자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문학적 기교까지 발휘해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최종 승리를 거두기 직전에 점점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 일련의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설득력 있게 그려놓았다. 그러나 결국 아스텍의 황제 몬테수마의 '소심함' 때문에 코르테스가 곧바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어놓을 수 있었다.
프레스콧은 역사를 직물을 짜듯이 극적으로 엮어냈다. 〈멕시코 정복사〉·〈페루 정복사〉에서도 역시 전투묘사, 인물 개성의 부각, 은유의 사용, 극적 만남, 위기 등이 되풀이되는데, 그는 문학적 효과를 위해 역사서술에서 이런 요소들을 솜씨 있게 처리했다. 그러나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가 자신의 자료에 충실했음은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스페인의 시각을 일관되게 유지함으로써 프레스콧은 지금까지도 라틴아메리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영·미 역사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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