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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국의 핵무기 독점은 비교적 단기간에 끝났다.
소련은 1949년 8월 29일 원자폭탄실험에 성공했고, 미국은 이에 대항하여 수소폭탄과 소형 원자폭탄의 개발에 착수하여 미국과 소련 양국은 핵폭탄개발 경쟁에 돌입했다. 이러한 와중에 최초로 등장한 핵전략은 아이젠하워 정부의 뉴 룩(new look)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전략공군을 중시하여 침략에 대하여 그즉시 대량의 핵보복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은 1954년 1월 미국의 기본적 전략은 대량보복이라고 선언했다.
이 전략은 '대량보복 전략'이라고 불리는데, 그후 미국의 핵억지 전략의 원형이 되었다. 1950년대 후반 소련은 미국 본토를 직접 폭격할 수 있는 폭격기를 배치했고, 더욱이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과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의 실험에 성공했다. 또한 1957년 10월에는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號)를 쏘아올려 핵 미사일 시대에 돌입했다. 미국의 인공위성계획 뱅가드는 2번에 걸쳐 쏘아올리는 발사단계에서 실패하여, 소련이 미사일 기술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미사일 갭 논쟁이 벌어졌다.
소련의 핵전력이 증강함에 따라 핵에 의한 대량보복능력이 미국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고, 미국과 소련 양측 어느 쪽이 선제공격을 감행해도 상대측의 핵공격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하는 '공포의 균형'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때문에 핵에 의한 대량보복의 위협으로 국지전쟁을 억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인식이 생겼다.
그결과 대량보복을 수정하여 소형핵무기를 개발하여 한정적인 전쟁에 대비하는 태도를 중시하게 되었다. 이것을 뉴 뉴 룩(new new look)이라고 한다.
1960년대에 핵전력이 정비되면서 대량보복 전략에 대한 비판이 표면화되었다. 핵무기는 파괴력이 거대하여 '사용할 수 없는 무기'가 되었기 때문에 국지전쟁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재래식 무기를 갖춘 통상병력을 중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1961년에 등장한 케네디 정권의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전면 핵전쟁으로부터 한정 핵전쟁 및 통상병력에 의한 국지전쟁으로의 전환 등 예상될 수 있는 모든 전쟁에 대처하는 것을 생각해내 '유연한 반응' 전략을 내놓았다.
이 전략은 각종 위협에 유연히 대응하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서 모든 종류의 전쟁을 억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을 펴낸 맥나마라는 핵전략에 대해서 적의 선제공격을 받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비취약 핵보복력을 중시했다. 맥나마라는 당초 적의 핵전력을 공격하는 '대 병력'(對兵力) 전략을 중시했었다.
그러나 소련의 핵전력의 비취약화에 따라 도시·공업 지대를 공격하는 '대도시'(大都市) 전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적의 핵전력을 공격하여 미국의 손해를 한정시키는 것과 함께 적의 기습공격을 받더라도 살아남는 핵전력으로 반격하여 '적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정도의 손해를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을 '확증파괴'(確證破壞) 전략이라고 하는데, 1960년대 이래 핵전략의 기초가 되었다.
이 확증파괴 전략에 대해서는 당초부터 비판이 있어왔다.
이 전략의 바탕에는 미국과 소련 양국의 도시·공업 지대를 상대의 핵공격에 대하여 취약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핵억지의 안정적 효과를 가져온다고 전제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비판과 일반 시민의 대량살상을 기초로 하는 정책으로서 비인도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소련이 군사목표에 대하여 한정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 일반시민의 피해가 한정되는 경우 과연 소련의 도시·공업 지대에 핵공격을 행하여 대량보복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핵전략의 수정이 1970년대부터 이루어져오고 있다. 확증파괴 전략의 수정에 착수한 것은 1969년 1월에 등장한 닉슨 정권이었다. 닉슨 정부는 닉슨 독트린에 의거하여 동맹국에 대한 방위약속의 축소를 시도했다. 또한 대(對) 소련 핵전력의 균형을 중시하여 '충분'(sufficiency) 전략을 제창했다.
이 전략은 소련의 도시·공업 지대에 대한 공격뿐만 아니라 군사목표의 공격도 고려에 넣은 것이다. 이것은 닉슨 정권의 말기에 슐레징거 국방장관에 의해 개발되었다. 슐레징거는 핵전략 공격의 타게팅 독트린(targeting doctrine)에 착수하여 도시·공업 지대에 대한 보복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군사시설을 핵전략 공격목표로 삼았다. 이 전략은 후에 '유연반응' 전략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전략의 채택과 함께 미국은 대 병력 전략을 중시하기 시작했고, 그중에서도 콘크리트로 방호되어 있는 미사일 사일로, 지휘관제 센터 등 하드 타깃(hard target)의 공격을 중시했다. 이 정책은 1977년 1월에 등장한 카터 정권에 의해 계승되어 핵전략 공격의 목표를 핵미사일·레이더·잠수함 등의 기지를 위시하여 지휘관제 센터, 핵저장시설 등에까지 확대했다.
카터 정권의 브라운 국방장관은 소련의 핵전략이 미사일 수와 총파괴력에서 우위에 있음을 지적하고 "소련이 갖고 있는 전력 우위 특질을 미국이 갖고 있는 다른 유리한 면으로 상쇄시킬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카터 대통령은 1980년 7월 핵공격 목표의 변경을 지시한 대통령령 제59호에 서명하여 이 '상쇄'(相殺) 전략의 시행을 확인했다.
닉슨의 충분 전략을 비롯하여 슐레징거의 유연반응 전략, 브라운의 상쇄 전략까지 일관되고 있는 미국의 핵전략 사상은 소련의 핵전력 증강에 대응하여 소규모의, 그리고 한정적 핵공격에서 대규모 전면 전쟁까지 예상되는 모든 양상의 핵공격에 대응하는 선택안을 가지고 이에 의해 핵억지를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핵전략이론은 핵무기체계의 기술적 진보에 대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1966년의 핵미사일 다탄두(MRV)화에 의해 운반탄두 수의 비약적 증가와 유도장치의 개선에 의한 명중도의 향상 등 핵미사일 기지와 지휘관제 센터 등 다수의 군사목표에 대하여 정확한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핵무기체계를 놓고 볼 때 전략폭격기, ICBM, 잠수함 발사탄도 미사일(SLBM)의 세 주력(主力) 간에 균형을 이루는 것을 가장 중시하고 있다.
미국은 그 핵전략의 바탕이 되는 핵무기 기술개발의 측면에서 끊임없이 소련을 앞서왔다.
1950년대 중반 전략폭격기와 원자력 잠수함을 개발했고, 1960년대 초반 원자력 항공모함, 1960년대 후반에는 다목표탄두(MIRV)를 개발했다. 소련은 미국보다 5~10년 뒤진 상태에서 그뒤를 추격했다. 1980년대에 핵무기 개발속도를 늦추지 않고,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10월에 1980년대의 핵전력증강계획을 발표했다. 이것은 1982~87년에 2,250억 달러를 투입하는 계획으로서 신형탄도 미사일(MX) 트라이던트 Ⅱ형 SLBM, 지상·공중·해상(중) 발사순항 미사일의 개발·배치를 결정했다.
1983년말 핵전략무기의 탄두수는 약 9,000발 수준이었으나 더욱 늘어날 계획이었다. 전략방위의 분야에서도 탄도 미사일 요격 미사일(ABM)과 레이저 무기의 개발이 진행되었다. 미국이 신형 핵무기를 개발함에 따라 목표 공격의 정확도가 눈에 띄게 높아져 운반 핵탄두 수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소련은 이같은 미국 핵전력의 증강을 선제 핵공격 능력의 증가로 보아 미국과 소련 간에 끊임없는 핵경쟁이 벌어졌다.
미국의 핵전략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한정핵전쟁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10월 유럽에 한정핵전쟁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1983년 11월부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결정에 따라 독일(당시 서독)·영국·이탈리아에 IRBM(퍼싱 H형, 지상발사순항 미사일)을 배치했다. 이 조치는 소련이 IRBM SS20을 동구권에 배치한 데 대한 대응조치였는데, 유럽 각국은 미국이 한정핵전쟁을 상정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깊이 우려했다. 미국의 핵전력 증강의 배후에는 군부와 연결되어 있는 군수산업의 압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주요 군수산업체는 약 4,000개사로서 미국 정부 무기조달비의 약 50%를 이들 회사 중 상위 25개사가 수주하고 있다. 군산복합체는 군사전략, 신무기체계의 개발·조달 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핵전력의 증강도 신형 핵무기의 개발에 의해 군사산업의 유지·확대를 꾀해온 거대 무기산업계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소련
소련의 핵전략은 미국과 같이 명백한 핵억지이론을 내세우지는 않지만 미국의 핵전략을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제1격으로부터 살아남아 미국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보복을 행하는 비취약한 전략핵전력의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 1949년 8월 최초로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이어 1953년 8월 수소폭탄실험에 성공한 소련은 1957년 8월에 세계 최초의 ICBM 실험을 했고, 이어 1959년 12월에는 전략 로켓군을 창설했다. 흐루시초프 제1서기 겸 총리는 1960년 최고간부회의의 연설에서 핵 로켓 제일주의를 주장하여 당시의 총병력 362만 명에서 120만 명으로 삭감하는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위기와 함께 이 삭감안은 중지되었다.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의 실각과 함께 등장한 브레주네프는 흐루시초프의 핵 로켓 제일주의를 버리고 통상군비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이것은 1961년에 케네디 정부가 등장하여 유연반응핵전략으로 이행하여 통상병력의 증강을 중시하는 데 대한 대응책인 것으로 여겨진다. 1964년에 폐지된 지상군 총사령부는 1967년에 부활되었고, 그때부터 통상전력을 중시하는 논문이 많이 발표되었다.
소련은 1960년대 중반부터 급속한 핵전력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1966년 4월의 제23회 당대회에서는 말리노프스키 국방장관이 "모든 종류의 핵탄두 스톡을 증대하여 이것을 사용하기 위한 장비를 준비한다"라고 보고하여 전략 로켓군의 충실을 과시했다. 미국측의 자료에 따르면 1960년대말 ICBM 수에 있어서는 미국을 추월했으며, SLBM 수에 있어서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이러한 핵전력의 균형 때문에 제1차 전략무기제한협상(SALT-1)이 1969년 11월부터 개최되었다.
1972년에는 SALT-1이 타결되어 전략무기의 수량적 상한이 설정되면서 전략무기의 근대화 계획이 급진전되었다. 1974년에는 4종류의 신형 미사일 실험이 행해졌고, 그 다음해인 1975년에는 SS17·18·19가 작전배치되었다. 또한 이해에 MIRV 장비의 미사일 배치가 시작되었다.
SLBM의 분야에서도 1972년에 델타급 신형 원자력 잠수함의 배치가 개시되었고, 이어 1980년에는 배수량 3만t의 타이푼급 원자력 잠수함 1호함이 진수되어 1983년에는 작전·배치되었다. 이들 잠수함은 장거리 사정의 SSN8·18 등의 미사일에 탑재되어 있다. 미국에 비해 늦어졌던 전략폭격기에 있어서도 1983년부터 신형인 블랙잭의 시험비행이 시작되었다. 이외에 전략핵무기와 전술핵무기의 중간 분야인 신형무기도 개발되어 1975년부터 중거리 폭격기 투폴레프 Tu26 백파이어의 배치가 시작되었고, 1977년부터는 사정거리 5,000km인 MIRV 3발을 장착한 기동형의 KRBM SS20이 배치되었다.
1983년말에는 백파이어 180기, SS20은 360기를 기록했다. 미국에서는 소련의 핵전력 증강에 따라 소련의 핵전력에 대한 우려가 점점 높아졌다. 미국측은 소련의 핵전략이 핵무기에 의한 전쟁의 억지보다는 핵무기를 전쟁수행의 수단으로 보아 핵전쟁으로 승리하려는 생각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되었다. 소련의 핵전력이 증강됨에 따라 미국은 지상에 고정 배치되어 있는 ICBM은 소련의 선제공격에 의해 대부분 파괴될 것이라는 우려로 핵군비 확장을 시도해왔다.
영국
영국은 1952년 10월 오스트레일리아의 몬테베로 제도에서 처음 핵폭발 실험을 행한 이래 독자적인 핵전력 보유의 길을 걸어왔다.
핵전력은 액체연료의 IRBM 블루스트리크의 개발에서 미국의 스카이볼트 미사일의 도입으로 바꾸어 1962년에는 폴라리스 미사일 탑재 원자력 잠수함의 도입을 결정했다. 영국은 미국의 폴라리스 미사일(핵탄두는 영국 독자의 것) 탑재 원자력 잠수함 4척을 주축으로 했었다. 1990년대에 구식화한 폴라리스를 미국제의 트라이덴트 미사일 탑재 원자력 잠수함으로 바꾸고 있는 중이다. 영국의 소규모 핵전력은 '최소한 억지'(minimum deterrence) 전략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소련이 서구의 주요도시에 대하여 핵공격을 해올 경우 영국은 소련에 대하여 보복공격을 행하여 소련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을 주안으로 하고 있다.
소련의 50개 도시를 공격하면 소련 인구의 20%, 공업능력의 40%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으로 소련의 핵공격을 억지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프랑스
프랑스의 핵전력 개발은 일관되게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특히 1958년 6월 드 골 정권이 성립한 이후에는 독자의 핵무장을 추구해왔다. 1960년 2월 사하라 사막에서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핵무장법이 성립되었다. 드 골 대통령의 국방방침은 "프랑스의 방위는 프랑스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유사시에는 다른 나라들과 동맹하겠지만 방위는 프랑스 자신을 위해서도 독자적인 책임하에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핵전력은 지하 사일로로부터 발사하는 IRBM SSBS 18기, SLBM 16기 탑재 원자력 잠수함 5척, 미라주 IVA형 폭격기 34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스의 핵전략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대도시 공격을 목표로 하고 있다.
중국
중국은 1964년 10월 최초의 핵폭발 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소련·영국·프랑스에 이어 5번째로 핵보유국이 되었다.
더욱이 1967년 6월에는 최초로 수소폭탄실험을 수행했고, 1970년 4월에는 인공위성을 쏘아올렸다. 1980년 5월에는 남태평양을 향하여 ICBM 실험을 실시했고, 핵전력의 정비에 박차를 가했다. 중국의 핵전력은 4기의 ICBM, 10기의 IRBM T3, 50기의 IRBM T2, 50기의 MRBM(준중거리 탄도 미사일) T1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의 핵전략은 최소한 억지 전략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소련이 압도적인 핵전력으로 공격을 해온다면 중국의 핵전력은 상당부분 파괴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핵미사일이라도 살아남는다면 소련의 도시들을 공격할 것으로 보인다. 소련은 한정적이기는 하지만 중국의 핵보복에 의한 피해를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중국에 대하여 행동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이러한 최소의 억지 전략에 바탕을 두고 소련의 선제공격에 대하여 핵잔존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SLBM 등을 개발했다.
기타 나라
유럽에서 중립정책을 취하고 있는 스위스·스웨덴은 미국과 소련의 양 진영에 속하지 않고, 그 어느 쪽에도 핵보장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또 양국은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여 핵무기를 보유·제조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분명하게 밝혔다. 두 나라는 총력방위의 방위정책을 바탕으로 하여 국내 침략의 경우 전국민을 동원하여 저항하는 방위전략을 취하고, 핵공격에 대해서는 셸터(대피소)에 의한 민간방위를 중시하는 특수한 대응책을 취하고 있다.
두 나라는 핵공격시 시민을 지킬 수 있는 셸터의 건설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 중립국은 강대국에서 핵공격을 해온다고 하더라도 전국토를 파괴하는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보기 때문에 핵전쟁이 시민생활에 끼칠 영향에 대해 더 중시한다. 스위스에서는 전국민의 50% 이상인 350만 명, 스웨덴에서는 70%인 550만을 수용하는 셸터를 건설하는 등 핵폭발과 방사성 물질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려는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외에 연료·식량 등도 국민생활을 장기간 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비축해 놓고 있다.
그밖에 일본은 국민들의 강한 핵거부 반응을 감안하여 '핵무기를 갖지 않는다, 만들지 않는다, 반입하지 않는다'의 비핵 3원칙을 핵정책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일본의 비핵 3원칙의 문제점은 미군에 의한 핵반입이다. 재일(在日) 미군에 관하여 ① 배치의 중요한 변경, ② 장비의 중요한 변경, ③ 전투작전 행동 등에 대하여 미국과 일본 간에 사전협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장비의 중요한 변경은 핵반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일본 정부는 미·일안보체제에 의해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핵위협이나 핵공격은 미국이 억지해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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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세계 각국의 핵전략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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