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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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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8. 3. 26, 이집트 카이로
사망 1936. 4. 28, 이집트
국적 이집트
재위 1922년~1936년

요약 영국에서 독립한 이집트의 첫번째 왕(1922~36 재위).
본명은 Ahmed Fuad Pasha.

푸아드 1세(Fu'ad I)

ⓒ Brain News Service/wikipedia | Public Domain

여러 행정직을 거친 뒤, 1917년 이집트 술탄이 되었다. 그무렵 이집트는 아직 영국의 보호령이었다. 1919년 영국은 협상을 통해 이집트에 좀더 많은 독립성을 부여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집트인들은 이 제의를 환영했지만, 누가 이집트의 요구사항을 체계적으로 공식화하여 영국인들에게 제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강력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던 술탄 푸아드가 통치 문제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 지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사드 자글룰이 이끄는 강력한 민족주의 운동단체인 와프드당이 등장했다. 자글룰은 자신이야말로 영국인들과의 협상을 주도하기에 적절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푸아드의 지지자들과 자글룰의 지자자들 사이에 팽팽한 대립이 일어났고 이러한 대립은 영국과 이집트의 협상을 결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자 1922년 영국은 이집트가 국내 문제에서 영국의 강력한 영향력에 복종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적으로 이집트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푸아드는 왕의 칭호를 얻었다. 영국의 일방적인 선언에 불만을 품은 푸아드는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줄곧 영국인과 이집트인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쌍무적인 독립조약을 얻어내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23년 자글룰이 잠시 망명한 사이에 푸아드는 헌법을 공포했다. 그러나 자글룰을 비롯한 망명자들이 돌아오자, 왕은 대중의 인기가 대단한 와프드와 맞서야 했다. 와프드는 헌법에 의해 창설된 제도를 이용하여 저항을 강화했다. 와프드는 1923, 1925, 1929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당당하게 다수를 차지했지만, 푸아드는 와프드를 지지하지 않고 자신의 영향력에 순종하는 각료들을 다수 임명했다.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푸아드는 카이로에 있는 유명한 이슬람 학술 단체인 알 아자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이 단체의 이익에 협조했는데, 이것은 그에게 중요한 대중의 지지를 가져다주었다. 1930년 그는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구헌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헌법과 새로운 선거법을 공포했다. 1931년 선거는 와프드의 지배를 받지 않는 협조적인 의회를 낳았고, 국내 정치는 1935년까지 안정되었다. 그러나 1935년 푸아드는 민족주의자들의 강한 압력에 굴복하여 1923년의 헌법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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