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911. 7. 5, 프랑스 몽부디 |
---|---|
사망 | 1974. 4. 2,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1962~68년 프랑스 제5공화국에서 총리를 지냈고 1968년부터 죽을 때까지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교사를 지내고 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1944년말 프랑스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샤를 드골을 만났다. 당시 그는 정치에는 문외한이었으나 곧 드골의 정책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드골은 퐁피두와의 접촉을 끊은 적이 없었으며 1958년 6월 알제리 위기가 발생해 다시 권력을 잡자 퐁피두를 개인 수석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퐁피두는 제5공화국 헌법을 초안하고 프랑스의 경제복구계획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알제리 위기가 해결되자 드골은 퐁피두를 미셸 드브레의 뒤를 이어 총리에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퐁피두 정부는 제2차(1962. 12~1966. 1)에 이어 제3차(1966. 1~1967. 3)·제4차(1967. 4~1968. 7)까지 계속되면서 총 6년 3개월을 총리로 재직했다. 이것은 4세대에 걸친 프랑스 정치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 1969년 4월 드골이 갑자기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퐁피두는 1969년 6월 15일 제2차 투표에서 58% 이상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재임기간 중 퐁피두는 주로 드골이 착수했던 정책들을 계속 추진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1962~68년 프랑스 제5공화국에서 총리를 지냈고 1968년부터 죽을 때까지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교사의 아들로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마르세유와 파리에서 교직에 몸담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중위로 참전해 무공십자 훈장을 받았다.
1944년말 프랑스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샤를 드골을 만났다. 당시 그는 정치에는 문외한이었으나 곧 드골의 정책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1944~46년 드골의 개인 참모로 일했으며, 드골이 1946년 1월 갑자기 사임한 뒤에도 그의 '재야 내각'의 일원으로 남아 있었다. 1946~49년 관광청장의 보좌관, 1946~57년에는 프랑스 최고행정재판소인 국참사원 청원의원으로 일했다.
1955년 파리에 있는 로트실은행에 들어가 전문 자격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승진해 은행장이 되었다(1959). 드골은 퐁피두와의 접촉을 끊은 적이 없었으며 1958년 6월 알제리 위기가 발생해 다시 권력을 잡자 퐁피두를 개인 수석 보좌관으로 임명했다(1958. 6~1959. 1). 퐁피두는 제5공화국 헌법을 초안하고 프랑스의 경제복구계획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9년 1월 드골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퐁피두는 은행으로 돌아갔다.
1961년 그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과 비밀협상을 위해 알제리로 파견되었다. 그의 활동 덕분에 마침내 알제리에서는 프랑스군과 알제리 게릴라의 휴전이 이루어졌다(→ 알제리 독립전쟁). 알제리 위기가 해결되자 드골은 퐁피두를 미셸 드브레의 뒤를 이어 총리에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퐁피두는 1962년 4월 총리직에 취임할 때까지는 사실상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드골은 1962년 10월 국민의회에서 실시된 불신임투표에서 졌으나, 같은 달 보통선거에 의한 대통령선거 국민투표에서 승리를 거두자 다시 퐁피두를 총리 자리에 앉혔다. 퐁피두 정부는 제2차(1962. 12~1966. 1)에 이어 제3차(1966. 1~1967. 3)·제4차(1967. 4~1968. 7)까지 계속되면서 총 6년 3개월을 총리로 재직했다. 이것은 4세대에 걸친 프랑스 정치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
퐁피두의 명성은 1968년 5월 프랑스 학생과 노동자가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을 때 최고조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는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협상에 참여하는 한편 필요한 개혁조치를 취하도록 드골을 설득했다. 또한 그레넬 협정(5. 27)을 체결함으로써 마침내 파업을 끝냈다. 퐁피두가 법과 질서의 회복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인 덕분에 드골파는 1968년 6월 30일 국민의회 선거에서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는 1968년 7월 드골에 의해 예기치 않게 총리직에서 해임되었지만, 드골파 내에서의 명성과 영향력은 여전했다.
1969년 4월 드골이 갑자기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퐁피두는 선거운동을 벌여 1969년 6월 15일 제2차 투표에서 58% 이상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재임기간 중 퐁피두는 주로 드골이 착수했던 정책들을 계속 추진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아랍 국가들과의 친선 및 경제적 유대 관계는 유지했으나 서독과의 관계는 좋지 못했고 미국과의 관계도 뚜렷이 개선되지 않았다. 그러나 약 5년 동안 프랑스에서 안정된 정부를 유지했으며 경제도 발전시켰다. 또한 그는 영국의 유럽 경제공동체(EEC) 가입을 지지했다.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기는 했지만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정치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