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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트누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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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때 프랑스의 플랑드르 지방 정복의 길을 열어준 전투(1745. 5. 11).

이 전투는 삭스 백작 모리스 원수가 거둔 가장 유명한 승리였다.

전투는 투르네(지금의 벨기에에 있음) 남동쪽 8㎞ 지점에서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모리스 백작 지휘하에 5만 2,000명의 군사가 참가했고 영국·하노버·네덜란드·오스트리아군으로 구성된 동맹군 측은 영국왕 조지 2세의 아들인 컴벌런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트의 지휘 아래 5만 명의 군사가 참가했다. 동맹군은 프랑스의 점령하에 있는 투르네를 구하기 위해 진군해갔다. 프랑스군은 동맹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요새를 급히 세우고 전투를 준비했다.

동맹군은 직접적인 전면 공격을 시도했다.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군대는 프랑스군의 우측을 공격하고, 영국군과 하노버군은 철통 같은 좌측을 공격했다. 1차 공격이 실패하자 동맹군은 1만 5,000명의 보병을 좌측공격에 투입했다. 군대가 정렬을 가다듬기 위해 멈추었을 때, 동맹군의 찰스 헤이 경이 전열의 앞으로 뛰어나와 축배를 든 유명한 일화가 벌어졌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볼테르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프랑스군을 향해 덤빌테면 덤비라고 외치며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처음 공격으로 프랑스군의 진지에 진입한 후 영국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진격하기 위해 퇴각했다. 마침내 프랑스 보병과 기사단, 그리고 프랑스에서 활약한 아일랜드 여단이 적군의 우측을 공격하자 영국-하노버군은 50%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게 되었다. 네덜란드군도 다른 지역에서 크게 손실을 입었다. 프랑스군의 사망자는 총 7,500명에 달했다. 연합군은 브뤼셀로 퇴각했고, 삭스 백작은 이 승리에 이어서 4개월 동안 투르네와 플랑드르 대부분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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