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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BC 76, 이탈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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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AD 4, 로마 근처 투스쿨룸 |
국적 | 로마 |
요약 로마의 웅변가·시인·역사가.
비록 현재 전해지지는 않지만 그가 기록한 당대의 역사는 아피안과 플루타르코스의 역사서들에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었다고 한다.
카툴루스가 이끄는 문단에서 활동했으며, BC 56년부터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BC 54년에는 호민관 C. 카토를 탄핵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폼페이우스의 미움만 샀다. 내전시 루비콘 강 일대에서 카이사르가 이끄는 부대에 합류했고, 아프리카 전투에서는 쿠리오와 함께(BC 49~45), 그리스·아프리카·스페인 등지에서는 카이사르와 함께 종군했다. 또 BC 44년에는 카이사르의 명령으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 대항한 스페인 전투에서 친위대 대장을 맡아 종군하기도 했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에는 안토니우스를 따랐고, 그의 명령으로 갈리아키살피나(지금의 이탈리아 북부)를 통치하기도 했다.
여기서 대문호 베르길리우스와 교분을 나누었고, 퇴역 장교에게 땅을 배급하는 과정에서 몰수당할 위기에 처한 베르길리우스의 재산을 보호해주기도 했다. 페루시네 전쟁중에는 참전하지 않았으나 자기 휘하의 군대는 상관 안토니우스에 대한 충성을 굳게 지키도록 했고, BC 40년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 브룬디시움 협정을 맺을 때 협상에 참여했다.
그해에 집정관이었던 그에게 베르길리우스가 제4전원시를 바쳤다. BC 39년 일리리아의 한 부족인 파르티니족을 정복해 그 전리품으로 그가 복구한 아트리움 리베르타티스에 로마 최초의 공공도서관을 건립했다. 이처럼 아래로는 선정을 베풀고 위로는 충성을 다했으므로, 말년에 관직에서 사퇴할 때 모두 그를 존경했다. 동방에 있는 안토니우스와 합류하기도 원하지 않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달리 얻고자 하는 것도 없었던 그는 악티움 전투(BC 31)에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고수함으로써 공화주의자의 품위와 독립성을 지켰다.
또한 문학과 문인들에게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수사학자 티마게네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불신임을 받아 곤경에 처했을 때 보살펴주기도 했다. 주로 이 시기에 그는 문학의 후원자로 활동해, 대중적인 시 낭송대회를 열기도 했다.
타키투스나 세네카의 의견에 따르면, 폴리오는 면밀하게 작성된 연설문과 주장을 확실히 관철시키는 아테네 특유의 절제된 언변을 완벽하게 결합시키는 탁월한 연설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문체는 키케로 류의 비평가에게 호평을 사지 못했으므로, 그의 연설문은 모두 소실되고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카툴루스, 헬비우스 킨나, 베르길리우스 같은 문호들은 폴리오가 가진 시적 자질을 인정했다. 그는 비극도 몇 편 써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등의 찬사를 얻기도 했으나, BC 35년 직후 역사물로 관심을 돌리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은 중단했다.
저서인 〈역사 Historiae〉는 BC 60~42년경 사이 로마의 1차 삼두정치(폼페이우스·카이사르·크라수스)부터 로마 공화정이 쇠망한 필리피 시대에 이르는 역사를 담고 있다. 또 인간과 문학 양식에 대한 준열한 비판자로서 카이사르의 잘못을 지적하고 키케로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한편, 브루투스에게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문학에 있어서는 살루스트의 구태의연한 고전풍이나 자신이 '파나비니타스'라는 경멸적인 말로 불렀던 리비우스의 편협한 지방주의를 모두 경계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옹호했던 최상의 가치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하에서 만개했던 로마의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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