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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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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새로 수립된 폴란드와 발트 해를 잇는 너비 32~112㎞의 기다란 땅.

비수아 강 하류를 따라 뻗어 있는 이 회랑은 베르사유 조약(1919)에 따라 패전국 독일이 폴란드에 돌려준 포젠(포즈나인) 주의 대부분과 베스트프로이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조항 가운데 이 결정만큼 독일인들의 적개심과 분노를 샀던 조항은 없을 것이다. 이 회랑은 포메른과 오스트프로이센 사이로 뻗어 있어서, 오스트프로이센 주를 서쪽의 독일 제국 주요부와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도 유의해야 한다. ① 이 땅은 옛날(즉 18세기말 폴란드 분할 이전)부터 폴란드의 땅이었고 주민도 대부분 폴란드인이었다. ② 이 조항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발표한 14개 평화원칙 가운데 제13항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폴란드 회랑은 폴란드가 '자유롭고 안전하게 바다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③ 폴란드에 양도된 땅에는 당시 순수 게르만 도시였던 단치히(그다인스크)가 포함되지 않았다.

단치히는 국제연맹이 관리하는 자유시로 설정되었다. 폴란드는 단치히를 대신할 만한 항구로서 이 회랑 끝에 그디니아를 항구로 개발했다. 그리고 독일인들은 이 회랑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때, 쟁점 또는 구실이 된 것은 바로 이 폴란드 회랑이었다. 1939년 3월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단치히의 반환을 요구하는 한편, 폴란드 회랑을 가로질러 독일 제국 본토와 오스트프로이센을 잇는 고속도로 건설을 허락해주고, 또한 이 도로상에서의 독일의 치외법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폴란드는 이 요구를 거절하고,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독일의 침략행위를 막아주겠다는 보장을 받아냈다.

9월에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고 이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히틀러는 폴란드 회랑, 단치히, 포젠을 비롯해 슐레지엔 경계 주변의 지역을 병합하고, 독일 지사를 두어 이곳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 지역의 국경선은 완전히 다시 그려졌고 독일과 폴란드 주민들의 대규모 이동이 시작되었다. 폴란드 회랑은 그다인스크, 오스트프로이센과 함께 폴란드 영토가 됨으로써 폴란드 회랑을 둘러싼 쟁점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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