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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49. 9, 프랑스 브르타뉴 브레스트 근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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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34. 11. 14,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영국 왕 찰스 2세의 프랑스 출신 정부.
Countess of Fareham, Baroness Petersfield, duchesse d'Aubigny라고도 함.
영국민들에게는 조금도 인기가 없었으나 정치에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브르타뉴 귀족 케루알 공 기욤 드 페낭쾨의 딸로 1668년부터 찰스 2세의 여동생이자 오를레앙 공작부인 헨리에타 앤과 함께 지내다가 1670년 5월 도버 비밀조약 체결을 위해 축제를 핑계 대고 앤을 따라 영국으로 갔다. 그해 6월 앤이 갑자기 죽어 의지할 곳이 없어지자 찰스는 그녀에게 왕비의 시녀자리를 주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프랑스 궁정이 그녀에게 영국 왕을 유혹하라고 명했다고 했지만 그 증거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국왕이 호의를 가진 듯하자, 프랑스 대사 콜베르 드 크루아시와 수석 국무장관 알링턴 경은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 그녀를 후원하는 데 힘을 모았다.
1671년 10월 서퍽의 유스턴에 있는 알링턴의 별장에서 왕과 그녀는 관계를 맺었으며, 1672년 7월 뒤에 리치먼드 공작이 된 아들 찰스 레넉스가 태어났다.
그녀는 프랑스 국왕의 이익을 위해 힘쓰겠다는 조건으로 프랑스 사절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루이 14세는 1673년 그녀에게 오비니 공작령을 비롯해 여러 선물과 특권을 내렸다. 또한 그녀는 몇 년 동안 계속 찰스의 총애를 누려 1673년 피터즈필드 남작, 페어럼 백작, 포츠머스 공작작위를 받아 1674년에는 1년 수입이 적어도 1만 파운드에 가까웠다.
댄비 백작, 선덜런드 백작, 샤프츠버리 백작 같은 거물급 정치인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능란하게 자기 위치를 지켰으며 또한 그들을 위해 왕에게 자신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탐욕이 지나쳐 신망을 잃었으며, 1678년 가톨릭 음모사건이 일어난 뒤, 로마 가톨릭교도이자 프랑스인이라는 이유로 위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왕이 죽을 때(1685. 2. 6)까지 계속 가까이 지냈으며, 왕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받아들일 때는 그녀가 도움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왕이 죽자 얼마 뒤 프랑스로 건너가 제임스 2세가 다스리는 동안 잠시 다녀간 것을 빼고는 그곳에서 살았다.
오비니에서 보낸 말년에는 수입이 없었으나 루이 14세가 그녀를 채권자들로부터 보호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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