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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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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20. 1. 20, 이탈리아 리미니
사망 1993. 10. 31, 로마
국적 이탈리아

요약 〈길〉(1954) 〈카비리아의 밤〉(1956)·〈달콤한 인생〉(1960)·〈8½〉(1963)·〈나는 기억한다〉(1974) 등의 작품을 통해 신사실주의를 비롯한 이탈리아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이 감독한 모든 영화 대본의 일부를 직접 썼는데, 가장 훌륭한 작품들은 꿈과 현실, 자서전과 환상이 상징의 세계 속에서 뒤섞이는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준다. 그는 전통적인 영화 제작 기법을 버리고 영화를 지극히 개인적인 표현수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그의 특유한 창조력과 개인적 문제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펠리니는 아드리아 해 연안의 피서지에서 태어났다. 이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인물과 장면 및 사건들이 그의 영화 곳곳에 암시되어 있다. 펠리니는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친구이며 조감독이 되어 영화에 입문했고, <길>, <카리비아의 밤><나는 기억한다>로 아카데미상을 3 차례 받았다.

개요

신사실주의 물결을 일으키는 데 참여했지만, 나중에는 회화적 형상과 환상에 관심을 쏟았다.

특히 〈길 La strada〉(1954) 〈카비리아의 밤 Le nottidi Cabiria〉(1956)·〈달콤한 인생 La dolce vita〉(1960)·〈8½ Otto e mezzo〉(1963)·〈나는 기억한다 Amarcord〉(1974)로 잘 알려져 있다.

가족과 어린시절의 영향

펠리니는 아드리아 해 연안의 피서지에서 태어났다.

이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인물과 장면 및 사건들이 그의 영화 곳곳에 암시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는 중산층의 순박한 식료품 판매상이었는데, 195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화 〈달콤한 인생〉과 〈8½〉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나타나 있다.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 아주머니들도 〈나는 기억한다〉를 비롯해 몇몇 작품에 재현되어 있는 그의 어린시절의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노에서 가톨릭 기숙학교에 다닌 경험이 〈8½〉에서 그의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아이들끼리의 심술궂은 행동과 예배의식의 겉치레를 결합한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다.

그밖에도 그는 어린시절에 영화와 특히 서커스에서 두드러진 영향을 받았다. 서커스에 대한 현란한 기억은 그가 1970년에 제작한 텔레비전용 영화 〈어릿광대들 I clowns〉에서 엿볼 수 있다. 펠리니는 청소년시절에 급우들을 이끌고 철없는 장난을 자주 했는데, 이 시절은 〈작은 악당들 I vitelloni〉(1953)이라는 영화에 재현되어 있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펠리니는 뚜렷한 목적이 없는 리미니에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938년 피렌체로 갔다.

여기서 그는 풍자주간지와 공상과학 연재소설에 삽화를 그렸다. 1939년에 그는 언론인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로마로 가서, 레스토랑을 돌아다니며 풍자만화를 팔았다. 이무렵에 알도 파브리치라는 배우를 만났는데, 펠리니는 나중에 이 삼류 희극배우의 고된 생활체험을 몇몇 작품에 담아냈다. 1940년 펠리니는 인기 있는 풍자주간지 〈마르크 아우렐리오 Marc'Aurelio〉의 편집자가 되었다.

1943년 그는 여배우 줄리에타 마시나가 출연하는 라디오 연속극을 썼는데, 줄리에타 마시나는 그해에 펠리니의 아내가 되었다. 1944년 연합군이 로마를 점령하자 풍자만화를 그려주는 가게를 내고 지나가는 군인들의 얼굴을 풍자적으로 그리거나 목소리를 녹음해주었다.

로셀리니 및 라투아다와 제휴

펠리니는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친구이며 조감독이 되어, 당시 로셀리니가 만들고 있던 〈무방비 도시 Roma città aperta〉(1945)를 제작하는 데 협력했다.

파브리치가 주연한 이 영화는 이탈리아 신사실주의의 이정표가 된 작품이다. 펠리니는 로셀리니의 다음 영화 〈파이사 Paisà〉(1946)에서는 훨씬 더 큰 몫을 했다. 이무렵에 이미 영화를 깊이 사랑하게 되어 〈기적 Il miracolo〉(1948)을 비롯해 몇몇 신사실주의 영화 작품들의 대본을 썼다.

〈기적〉은 로셀리니가 감독한 〈사랑 L'Amore〉의 제2부로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미국 대법원은 그뒤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펠리니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계기를 이루었던 해는 1950년이었다. 이해에 그가 시나리오 작가로서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영화 감독 알베르토 라투아다와 함께 〈다양한 빛 Luci del varietá〉을 감독·제작했다.

그의 아내는 이 영화뿐만 아니라 남편이 독자적으로 감독한 영화 〈하얀 미남자 Lo sceicco bianco〉(1952)에서도 단역을 맡았다. 〈하얀 미남자〉는 신혼여행을 떠난 신부가 매우 사실적인 연재만화 주인공에게 반해버린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가 만든 영화는 모두 흥행에 실패했지만, 이듬해에도 그는 시골에서 어머니의 치마폭에 싸여 자란 게으른 사내아이들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꾸짖은 〈작은 악당들〉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으며 일부 비평가들은 아직도 이 영화를 펠리니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다.

원숙기

1954년에 펠리니는 예전에 기획했던 〈길〉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줄리에타 마시나와 앤서니 퀸이 주연한 이 영화는 남루한 모습으로 방랑하는 남녀 야바위꾼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비테르보와 아브루초 사이에 있는 황량한 시골에서 야외촬영으로 제작되었는데, 이곳에는 두 주인공 사이의 비정한 관계를 반영하는 빈 공간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탈리아의 좌익 언론은 이 영화를 비난했지만, 해외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미국의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가 주는 오스카상(아카데미상)을 받았으며, 1956년에는 최우수 외국영화로 뉴욕 영화비평가상을 받았다.

펠리니의 다음 작품인 〈속임수 Il bidone〉(1955)는 사기꾼들을 다룬 영화였다.

〈카비리아의 밤〉(1956)은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줄리에타 마시나는 이 영화에서 미래에 대한 신념을 끝내 잃지 않는 순박한 로마 창녀로 출연했다. 이 영화는 펠리니에게 또다시 아카데미상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 영화를 만들기 시작할 때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내용이 혼란스럽고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배우(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를 주연으로 기용했다는 이유로 제작자들이 참여를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이해한 출판업자 안젤로 리촐리가 마침내 제작을 맡아주었다.

펠리니는 그뒤 7년 동안 리촐리와 함께 일했다. 〈달콤한 인생〉을 만들 때는 로마의 중심가 중 하나인 베네토 거리를 세트로 새로 지었다. 완성된 영화는 시대의 파노라마, 즉 냉혹한 언론인들, 유명인사들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텔레비전 사진기자들, 영화배우에 미친 사람들, 퇴폐적인 지식인과 귀족들에 대한 주목할 만한 고발장이었다.

이 영화는 개봉되자마자 그때까지 만들어진 영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고,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달콤한 인생〉과 마찬가지로 펠리니의 다음 작품도 결론이 없는 영화이지만, 종래의 틀에 박힌 제약에서 벗어난 이야기이다. 펠리니가 그때까지 만든 작품 수를 따서 〈8½〉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 영화는 창작력이 마비 상태에 빠져 단 한 편의 영화도 만들지 못하는 한 유명한 영화감독의 곤경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는 상징주의와 사실주의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영화는 논쟁과 찬탄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그는 역시 줄리에타 마시나가 주연을 맡은 〈정령들의 줄리에타 Giulietta degli spiriti〉(1965)에서도 환상의 세계를 탐구했다. 그가 처음으로 만든 천연색 장편영화인 이 작품은 흥행에 실패했다. 몇 가지 오해가 잇따라 제작자 리촐리는 결국 펠리니와 결별했다. 펠리니는 그뒤 몇 년 동안을 새로운 착상과 새로운 재정 후원자를 찾았다.

그가 다음에 착수한 영화는 〈펠리니 사티리콘 Fellini Satyricon〉(1969)이었다. 이 작품은 주로 고대 로마의 작가 페트로니우스에게 영감을 얻었지만, 아풀레이우스를 비롯한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도 의존하고 있다. 이 영화는 고대를 무대로 목적이 없는 젊은이들의 방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펠리니는 역사적 정확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리스도교 신앙과 원죄라는 개념이 생겨나기 전의 인간 조건을 탐구하려고 애썼다. 〈펠리니 사티리콘〉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영상은 매혹적이지만, 내용 자체는 기괴한 경우가 많다.

아마 그 반작용이겠지만, 이탈리아·프랑스·독일 텔레비전이 후원한 텔레비전용 영화인 다음 작품 〈어릿광대들〉에서 그는 다시 자서전으로 돌아갔다. 서커스 세계에 바치는 감동적 찬사인 이 영화는 그 단순함과 응집성 때문에 〈길〉의 시적인 매력을 생각나게 한다. 〈로마〉(1972)는 영원한 도시 로마를 인상주의적으로 묘사한 영화로서 1930년대말에 펠리니가 로마를 처음 보았을 때의 자화상이 옛날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영화 곳곳에 뒤섞여 있다.

구경거리와 환상이 점점 고조되는 이 영화는 성직자들의 패션 쇼와 텅 빈 밤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모터사이클들의 무시무시한 발레에서 절정에 이른다. 펠리니는 1930년대초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면서 풍부한 회화적 영상으로 가득 차 있는 시골 생활의 화려한 행렬 〈나는 기억한다〉를 만들어 3번째로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후기 영화는 많은 비평가들을 실망시켰다.

〈카사노바 Casanova〉(1976)는 몇 개의 눈부신 세트가 있을 뿐 분명한 형태가 없는 단순한 이야기로, 여자를 기계적으로 정복하는 불한당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주인공의 여자에 대한 자랑스러운 정복은 너무 기계적이어서 그는 언젠가 베네치아에서 만난 적이 있는 로봇을 가장 완벽한 짝으로 기억하고 있다. 〈오케스트라의 예행연습 Prova d'orchestra〉(1979)은 관객을 속이는 단순함 뒤에 짓궂은 애매모호함을 숨겨놓은 은유적 영화로서, 일부 관객을 분노케 했다.

이 영화에서 오케스트라의 예행연습은 외부의 위협을 받아 해체되어 가부장제와 독재로 후퇴하는 사회 조직을 상징한다. 남성과 여성의 전쟁을 다룬 성적 환상이 가득한 장편영화 〈여자들의 도시 La città delle donne〉(1980)를 발표한 뒤 펠리니는 몇몇 남녀 비평가들로부터 지루하고 방종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배는 계속 항해한다 E la nave va〉(1983)는 1914년에 아드리아 해를 순항하는 호화 정기여객선을 무대로 하고 있다.

오페라 배우들과 그들의 부유한 친구들은, 죽으면서 자기 시신을 화장하여 그 재를 아드리아 해에 뿌려달라고 부탁한 유명한 오페라 프리마돈나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영화에는 무대 예술가들의 잘난 체하는 몸짓과 다가오는 세계대전의 공포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평가

펠리니는 30년에 걸쳐 만든 일련의 중요한 영화를 통하여 영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지위를 확보했다.

그는 자신이 감독한 모든 영화 대본의 일부를 직접 썼는데, 가장 훌륭한 작품들은 꿈과 현실, 자서전과 환상이 상징의 세계 속에서 뒤섞이는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준다. 그는 전통적인 영화 제작 기법을 버리고 영화를 지극히 개인적인 표현수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그의 특유한 창조력과 개인적 문제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현대 세계에서 인간이 느끼는 극적인 고독을 강조함으로써 영화라는 표현 수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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