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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0. 8. 18, 리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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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2. 8. 24, 프랑스 파라메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무용수·안무가.
19세기를 주도한 4명의 발레리나를 위해 안무하여 20세기에도 자주 재공연되는 〈4인무 Pas de Quatre〉(1845)를 비롯해 많은 낭만파 발레의 걸작들을 남겼고 〈지젤 Giselle〉(1841)에서 여러 춤을 안무했다. 순수 발레 또는 공식 발레에 대립되는 표현 발레를 이끌었던 오귀스트 베스트리스와 살바토레 비가노에게 춤을 배웠다. 1830년 파리 오페라단에서 데뷔했고 여기에서 남성 무용수들에 대한 당시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전적 춤과 마임 형의 춤으로 갈채를 받았다.
무릎장애와 파트너인 마리아 탈리오니의 직업상의 질투로 인해 1835년 부득이 파리 오페라단을 떠났다. 그뒤 곧 무용수이자 안무가로서 유럽을 순회했고(1835~40), 나폴리에서 젊은 발레리나 카를로타 그리시를 만나 그녀를 훈련시켰으며 후일 그녀와 결혼했다.
1840년 다시 파리에서 공연했으나 그리시만 파리 오페라단에 무용수로 고용되었다. 그는 그리시의 독무를 자주 각색했기 때문에 오늘날 그리시가 맡았던 〈지젤〉의 주제 역도 그의 안무로 여겨진다. 이 〈지젤〉의 주제 역은 아직도 발레리나의 예술적 기교를 시험하는 최고점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지젤〉을 안무한 모든 공로는 장 코랄리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1842~48년 런던에서 작업하면서 카를로타 그리시, 마리아 탈리오니, 루실 그란, 패니 체리토 등을 위해 〈옹딘 Ondine〉(1843)·〈에스메랄다 Esmeralda〉(1844)·〈4인무〉 같은 발레들을 안무함으로써 런던을 중요한 발레 중심지로 만들었다. 184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황실 발레단의 일급 무용수가 되었고 여기서 8편의 발레를 새로 창작하고 많은 작품들을 재공연했다.
〈에스메랄다〉·〈지젤〉 같은 몇몇 발레는 1895년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러시아 발레의 레퍼토리로 남았고 10월 혁명 이후에도 소련 발레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자신의 주요작들을 재공연했으나 당시 서유럽에서는 그의 발레의 특징이던 표현적이고 극적인 요소들보다 기술적 묘기가 더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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