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 로마 |
---|---|
사망 | 824. 2. 11, 로마 |
국적 | 바티칸시티 |
요약
축일은 5월 14일. 교황(817~824 재위).
(영). Saint Paschal Ⅰ.
사제로서 교황청에서 일한 적이 있고, 대수도원장으로 있다가 817년 1월 26일 교황 스테파노 4세가 죽은 직후 그를 계승하여 교황에 선출되었다. 재위기간 동안 샤를마뉴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경건왕 루트비히 1세가 다스리는 프랑크 제국과 교황청의 관계에 지속적인 관심을 쏟았다. 루트비히는 교회에 수도원과 교구에 대한 전례 없는 개혁과 재조직을 요구하는 한편, 제국을 정돈하고 그리스도교의 질서와 통일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파스칼은 루트비히로부터 로마 교황청의 독립, 교회령에 대한 주권, 로마인의 자유로운 선거권을 얻어냈다.
823년 루트비히의 아들 로타르 1세에게 공동 황제의 면류관을 씌워주었는데, 이 행위는 최초로 교황이 황제에게 악을 진압하기 위한 세속권을 상징하는 칼을 수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편 로마에서는 프랑크 제국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파스칼도 이 운동에 가담한 듯하다. 그의 대신들 가운데 몇몇 사람은 파스칼에 대한 음모를 꾸미고 황제의 로마 통치를 찬성했다는 죄목을 내걸고서 프랑크당 지도자 두 사람을 교황청에서 처형했다. 루트비히는 진상조사를 명령했고, 파스칼은 맹세로써 자신의 결백을 밝혀야 했다. 면밀한 진상조사는 모략 때문에, 그리고 유한한 인간은 그 누구도 교황을 재판할 수 없다는 주장 때문에 흐지부지 되었다. 그러나 전하는 바에 따르면 황실은 처형사건 때문에 파스칼을 미워했고, 로마를 더욱 단호하게 감독하게 되었다고 한다.
파스칼은 더 나아가 아르메니아 출신 비잔티움 황제 레오 5세 때 동방에서 성상파괴운동이 다시 일어나는 사태를 겪었다. 정통신앙과 성상 공경을 앞장서 옹호한 동방의 대수도원장 테오도루스 스투디테스는 교황에게 지원을 호소했고,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사절을 보냈다. 이러한 개입은 실패로 판명되었으나, 로마로 도망쳐 온 그리스 수사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파스칼이 로마 건축사업에 쏟은 노력은 샤를마뉴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축성된 이후의 시대를 특징짓는다. 산타프라세데 대성당과 산제노 대성당의 부속 경당들은 모두 장엄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는 건물들로서 그의 작품들이다. 또한 돔니카에 산타마리아 대성당을 건축했고, 산타체칠리아 대성당을 복원했다. 성 체칠리아(카이킬리아)의 유골을 포함한 많은 순교자들의 유골들을 카타콤바(지하묘지)에서 로마로 이장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종교인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