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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0. 1. 12, 미국 텍사스 마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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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9. 7. 9, 버지니아 프레더릭스버그 |
국적 | 미국 |
요약 미국의 민권운동 지도자.
인종평등회의(Congress of Racial Equality/CORE)를 이끌었고, 비폭력 연좌농성과 프리덤 라이드(Freedom Rides: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미국 남부지방의 버스 또는 기차여행) 운동을 도입했다.
파머는 미시시피 주 홀리스프링스에서 자랐다. 목사이자 교수였던 그의 아버지는 학생 전원이 흑인인 러스트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파머는 텍사스의 와일리대학과 워싱턴 D.C.의 하워드대학교를 다녔으며, 평화주의 단체인 화해협회(Fellowship of Reconciliation/FOR)에서 일했다. 모한다스 간디의 저작을 읽고 감동을 받은 그는 1942년 시카고에서 CORE를 공동 창립했다. 1946년 미국연방대법원은 주간(州間) 버스의 인종차별적 좌석 배치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으나 남부는 이를 무시했고, CORE와 FOR는 흑인들과 백인들의 힘을 합쳐 처음으로 프리덤 라이드 운동을 전개해 이에 항의했다.
CORE는 1961년 5월 장거리 교통수단의 인종차별 실태를 점검하기 위해 다시 대규모로 프리덤 라이드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프리덤 라이드 운동원들은 구타와 소이탄 공격 등 군중들의 방해를 받았고, 로버트 케네디 미국 검찰총장이 주 관리들에게 프리덤 라이드 운동원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에야 항의운동을 끝마칠 수 있었다. 그 후 파머는 미시시피 감옥에 40일 동안 수감되었고, 그 동안 CORE 지원자들은 인종차별에 항의해 평화적인 농성을 전개했다.
1963년 3월 워싱턴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연설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날, 파머는 루이지애나의 감방에서 그 행사를 보도하는 라디오 방송을 들어야 했다. 프리덤 라이드 운동은 기회 균등과 선택의 자유를 위한 미국 흑인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CORE는 1960년대 초반 민권운동을 선도했던 단체로 백인들의 적대적인 반응 속에서 남부 도처에 걸쳐 시위를 조직했다. CORE의 지원자들은 폭행과 최루가스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투옥되거나 살해되기까지 했다. 파머 자신도 KKK단에게서 살해 위협을 받았으며, 심지어 관 속에 몸을 숨긴 채 장의차를 타고 루이지애나 주 민병대의 손아귀에서 탈출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1964~65년 민권법과 투표권법이 통과되었다.
1965년 CORE 의장에서 물러난 뒤 파머는 뉴욕 주 브루클린에서 무소속 후보로 의회 선거에 나섰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1차 행정부에서 보건·교육·복지 서기관보를 지냈다. 그 밖에 노동과 인종 관계에 관한 책들을 썼고, 여러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1998년 그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수여하는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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