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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18. 9. 29(구력 9. 18), 폴란드 그다인스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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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83.4.11(구력 3. 31),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국적 | 러시아 |
요약 러시아의 정치가.
예카테리나 2세(1762~96 재위)의 주요 외교 고문관으로 활약했다. 에스토니아 페르누(페르나우) 주재 러시아 사령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740년 러시아 군대에 입대했으며 1747년 덴마크 주재 외교사절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스웨덴으로 전출하여 1760년까지 근무했다.
스웨덴에서 친프랑스 정당의 주요한 반대세력으로 공식 활동을 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인 정치관 및 헌정개념을 발전시켰다. 1756년 러시아가 외교정책을 바꾸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으로 7년전쟁에 가담했을 때 그의 위치는 더 어렵게 되었다. 1760년 은퇴하려 하자 옐리자베타 여왕(1741~62 재위)은 그가 러시아에서 가장 박식하고 세련된 젠트리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후계자의 아들인 파벨 대공(나중의 표트르 3세, 1762 재위) 및 파벨의 부인(나중에 예카테리나 2세, 1762~96 재위)의 교육을 맡아달라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불렀다.
1762년 표트르가 쫓겨날 때 파닌은 파벨을 황제라 칭하고 예카테리나는 섭정만 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그는 특히 외교분야에서 예카테리나의 신임받는 고문관이 되었다. 1763년 외교단의 책임자라는 공식지위를 얻은 그는 '북부협정'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 개념은 프랑스-오스트리아 블럭에 대항해 러시아·프로이센·폴란드·스웨덴, 그리고 아마도 영국까지 포함하는 동맹체제를 뜻하며 그는 러시아의 외교정책을 이와 같은 동맹체제를 만드는 쪽으로 돌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이 개념과 관련해 폴란드가 강력한 독립국가로 발전해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옹호했다. 이런 이유로 그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온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충돌하게 되었다. 또 예카테리나와도 충돌했는데 그녀와 프리드리히는 폴란드가 약하고 보조적인 나라로 남아 있는 쪽을 더 선호했다. 예카테리나의 주장에 따라 파닌은 그녀의 옛 애인인 스타니수아프 포니아토프스키를 폴란드 왕에 앉히고 폴란드를 러시아에 사실상 종속시켰다(1764). 그리고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와 협상을 벌여(1770~71) 결국 제1차 폴란드 분할을 이끌어냈다(1772).
자신의 원대한 계획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닌은 프로이센과 가깝게 지내기를 권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는 오스트리아와의 관계증진을 더 원했으며 예카테리나의 뜻이 관철되었을 때 파닌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예카테리나는 미국 독립전쟁중 영국의 개입에 대항해 중립적인 선박의 보호를 조직화하려는 자신의 계획(1780)을 놓고 파닌과 다툰 뒤 마침내 1781년 5월 그를 해임했다. 파닌과 보론초프 가문은 러시아 젠트리의 지위를 재규정하자는 운동의 지도자들이었다.
영국과 스웨덴의 귀족개념에 고무되어 그 운동은 젠트리의 불분명한 권리 및 특권을 인정할 것과 정부의 독단에서 보호할 것을 요구했다. 귀족사회의 상층부만 이 운동을 지지했다. 이 운동은 표트르 3세를 몰아낸 예카테리나가 파닌이 제안한 추밀원 창설을 고위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거부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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