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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6년 7월 31일, 미국 버지니아 사우샘프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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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70년 3월 28일, 샌프란시스코 |
국적 | 미국 |
요약 미국 남북전쟁(1861~65) 때의 북군 장군.
1863년 9월 불굴의 정신으로 테네시 시를 방어한 뒤에 '치카모가의 바위'로 알려지게 되었다.
1840년 뉴욕 웨스트포인트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멕시코 전쟁(1846~48)에 참전했으며 육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남부 태생임에도 불구하고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북군에 남았다. 켄터키 동부에서 단독으로 군대를 이끌고 1862년 1월 19일 밀스프링스에서 남군을 공격해 서부전선 최초의 중요한 승리를 북군에게 안겨주었다. 돈 카를로스 뷰얼 장군 밑에서 복무하면서 사령관직을 제의받았으나 거부했다. 윌리엄 S. 로즈크랜스 장군 휘하에 있으면서 테네시의 스톤스 강(머프리즈버러) 전투에 참여했고, 테네시의 데처드에서 채터누가까지의 기동작전에 가장 중요한 책임을 맡았다. 1863년 9월 19~20일 치카모가 강을 따라 2일 동안 전투가 벌어진 뒤 그는 기민하게 북군의 방어진을 구축해 우익에 가해지는 남군의 격렬한 공세를 막아냄으로써, 북군이 예비부대의 도움으로 질서정연하게 퇴각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은 활약으로 육군준장으로 승진했고, 이어 로즈크랜스를 대신하여 컴벌랜드 부대를 맡았다. 그의 부대는 11월 북군이 채터누가에서 대승을 거둘 때 눈부신 활약을 했다.
1864년 가을에 북군의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은 그에게 당시 북군의 병참선을 위협하고 있던 남군의 존 B. 후드 장군 부대를 공격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토머스는 적들을 테네시의 프랭클린(11. 30)과 테네시의 내슈빌(12. 15~16)에서 격파함으로써, 크리스마스 때까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 역사적인 전투에서 남군이 겪은 패배는 야전에서 입은 패배 중 남북을 통틀어 최악의 것이었다.
그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의회는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전쟁 뒤에는 켄터키와 테네시 군관구를 맡았으며 1869년 샌프란시스코에 사령부를 둔 태평양 사단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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