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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20, 카스티야 바야돌리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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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98. 9. 16, 아빌라 |
국적 | 스페인 |
요약 스페인 최초의 종교재판소 소장.
그의 이름은 종교재판소의 공포, 종교적 편협함, 잔인한 광기와 동의어로 쓰였다. 1452년 도미니쿠스 교단에 들어가 22년 동안 세고비아의 산타 크루스 수도원 부원장을 지냈다. 유대인 개종자 마라노스, 이슬람 개종자 모리스코스, 유대교도, 무어인 등이 스페인의 안녕을 위협한다고 믿은 그는 가톨릭 군주인 여왕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5세의 고해 신부이자 조언자로서 이들의 종교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유대인 후예였던 그는 1492년 지배자들을 설득하여 세례받기를 거부하는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하도록 했고, 이로써 대략 1만 7,000명의 유대인이 스페인을 떠나야 했다.
1483년 8월 그는 카스티야와 레온, 10월 17일에는 아라곤·카탈루냐·발렌시아·마요르카의 종교재판소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종교재판소 재판장으로 토르케마다는 세비야·하엔·코르도바·시우다드레알·사라고사에 지방재판소를 설립했다. 이듬해에 그는 종교재판관들에게 이단·배교·주술·이중결혼·고리대금업·신성모독 등 범죄 재판의 지침이 되는 28개의 조항을 반포했고, 피고인이 자백하지 않으면 증거를 얻기 위해 고문을 가해도 좋다고 허용했다. 그의 재직 기간에 화형당한 사람의 숫자는 대략 2,000명으로 추정되어 왔다. 널리 불법이 자행되고 원성이 자자한데다, 그의 건강과 나이를 고려해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1494년 6월 토르케마다를 견제하기 위해 4명의 보조재판관을 임명했다. 종교재판관으로서 그의 공적 경력은 엄격한 비타협성으로 특징지어졌는데, 이는 당대에는 여론의 지지를 받았겠지만 정당화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왔다. E. 루카가 쓴 〈토르케마다와 스페인 종교재판소 Torquemada und die spanische Inquisition〉가 1926년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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