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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1. 11. 30, 그리스 레브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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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2. 12. 23, 런던 |
국적 | 캔터베리 |
요약 캔터베리의 대주교·교육개혁가.
학교장이자 주교로서 소탈한 외모와 꾸밈없는 태도로 영국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 유행했던 '남자다움'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인물로 간주되기도 했다. 1847년 사제로 임명된 템플은 모교인 옥스퍼드대학교 강사를 그만두고 1848년 교육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850~55년 템플은 넬러홀교육대학의 학장을 지냈고, 1855~57년에 정부 장학관을 지냈다.
럭비 학교의 개혁가 토머스 아널드의 아들인 영국의 시인 매슈 아널드의 추천으로 그는 1857년 럭비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빅토리아 여왕의 궁정 목사로 있는 동안 특히 역사·과학·음악 분야에서 럭비 학교 교과과정을 확대했으며 새 건물을 여러 채 짓도록 했다.
1860년 〈에세이스 앤드 리뷰스 Essays and Reviews〉(1860)에 실린 〈세계의 교육 The Education of the World〉이라는 그의 기고문이 종교적 관점에서 너무 자유주의적이라는 논쟁이 있었지만 템플은 학교연구 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1864~67) 교육개혁가로서의 명성을 유지해나갔다. 그러나 1864년 영국국교회 성직자 회의는 그의 평론을 비난했고 1869년 그가 엑서터의 주교로 임명되자마자 예전의 반대가 되살아났다.
템플은 주교서품 직후 1860년에 발행되었던 책의 개정판에서 그의 글을 삭제하는 것에 동의했다. 템플은 1885년 런던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896년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고, 이로써 영국국교회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1년 뒤 요크의 대주교 매클레건과 함께 영국국교회 성직위계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교황 레오 13세의 칙서에 대해 강경하게 반론을 제기했다. 이 두 대주교들은 1899년에 다시 행렬 등과 향을 사용하는 것은 영국국교회식 예배에 어긋나는 관행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프레더릭 템플의 아들 윌리엄 또한 켄터베리의 대주교(1942~44)가 되어 부친의 교육개혁을 도왔는데, 이는 특히 1944년 교육법에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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