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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050경, 그리스 에게 섬 에우보이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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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109경 |
국적 | 그리스 |
요약
그리스 정교회 오크리다(지금의 마케도니아 오흐리트)의 대주교, 신학자, 언어학자.
Theophylact of Ohrid라고도 씀.
중세 초기에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에게 비잔틴 문화를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미카일 프셀루스에게서 공부한 테오필락투스는 총대주교의 아카데미에서 최초의 수사학교수가 되었고, 권좌에 오를 것으로 추정되는 상속자의 가정교사가 되었으며,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부제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군주들의 교육 Paideia basilikē〉을 저술했다.
1078년경 불가리아인들이 살고 있는 오크리다의 대주교로 선출된 테오필락투스는 사실상 제국의 정치적·문화적 구조 속으로 식민지 사람들을 동화시키려는 비잔틴 정책의 중재자가 되었다.
그의 방대한 서신(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제국 및 교회 당국자들에게 보냄)은 불가리아 교회의 상황과 불가리아 교회가 그리스 세계와 맺고 있던 관계에 대해 남아 있는 자료 중 가장 훌륭한 것이다.
편지에서 테오필락투스는 제국의 그런 황량한 변경으로 추방된 데 대해 깊은 불쾌감을 표시하고, 때때로 슬라브의 독특한 이름들을 인용한 것에 대해 사과하면서 야만족(즉 그리어를 모르는) 불가리아인들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취자인 비잔틴의 세금징수인들로부터 슬라브인들을 보호했다. 그는 이런 불만의 씨는 종종 그리스의 지방관리들의 자의적인 관행으로 한층 심화되었다고 하며, 콘스탄티노플의 당국자들은 불가리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그들을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슬라브 민족들에게 신실한 찬사를 보낸 테오필락투스는 최초의 슬라브인 주교의 일대기인 〈오크리다의 클레멘스의 생애 Life of Clement of Ochrida〉를 썼고, 슬라브인들에게 최초의 전도자이며 슬라브어 알파벳을 만든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에 대해 극구 칭찬을 했다.
〈라틴 사람들이 공격받는 문제에 관한 연설 Allocutio de iis quorum Latini incusantur〉(1090경)에서 테오필락투스는 자신과 같은 종교를 믿는 그리스 사람들이 서방의 그리스도교를 비방하는 데 대해 혹독히 비판했다. 그렇지만 교황이 모든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수위권을 주장하는 것과 삼위일체에 관한 서방의 신학적 입장은 반박했다. 이런 것들을 근본적인 문제로 간주하는 그는 자신의 정통적인 입장을 수정하기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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