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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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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BC 404/403, 그리스 아테네 |
국적 | 그리스 |
요약 아테네의 정치가·군인.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 말기에 활약했으며 생전에뿐만 아니라 그뒤에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아버지인 하그논은 페리클레스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으며 임기가 1년인 아테네의 10인 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거듭 선출되었다.
혁명 지도자로 등장한 BC 411년, 테라메네스는 아테네의 민회를 설득해 기존 행정기구들의 권한을 일시 정지시키고 잠정적으로 '400인회'에 최고행정권을 맡기도록 했다. 시칠리아 원정(BC 415~413)의 참패와 하위동맹국들의 계속적인 반란으로 인해 아테네의 재정상태는 매우 악화되었다.
혁명 운동의 의도는 일반적으로 헌법을 경제적인 문제에 더 중점을 두고 수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400인회는 4개월을 채 넘기지 못하고 없어졌다. 사모스 섬에 정박해 있던 아테네 해군 주력함대의 지지를 얻지 못한데다가 위원회 내에 분파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BC 411년 가을 아테네의 항구인 피레에프스에 요새를 쌓고 있던 군대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위원회는 테라메네스를 이곳으로 보내 진압하게 했는데 그는 반란군의 선봉에 섰다. 이 일로 인해 회의를 연 민회는 400인회를 해체하고 종래의 정치제도를 대부분 회복시켰으나 시민의 권리를 일부 제한하고 정치적 권한을 '5,000인회'로 불리는 기구에 넘겨주었다.
BC 410년 테라메네스는 20척의 함정을 이끌고 알키비아데스와 협력했으며 아테네의 주력함대는 프로폰티스(마르마라 해)의 해안가에 있는 시지코스 근처에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에게 완승을 거두었다. 알키비아데스는 테라메네스의 지시에 따라 크리소폴리스에 요새를 쌓고 흑해에서 나오는 모든 선박들에게서 통행세를 강제징수했다.
여기서 나오는 수입 덕분에 아테네는 5,000인회의 통치를 끝내고 기존의 정치제도를 완전히 회복시킬 수 있었다.
BC 406년 테라메네스는 함장의 자격으로 소아시아 서쪽 해안에 있는 아르기누사이 제도에서 벌어진 해전에 참가해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를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오면서 그는 전투를 지휘한 8명의 군사위원들에 대한 여론을 나쁜 쪽으로 유도했다. 그 가운데 6명의 군사위원들은 전투중 파괴된 선박에서 탈출한 군인들을 구하지 않아 직무를 태만히 했다는 비난을 받고 처형당했다.
BC 405~404년 사이의 겨울에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아테네를 포위했을 때 테라메네스는 스파르타의 장군 리산드로스와 협상하기 위해 직접 나섰으나, 그가 스파르타 진영에서 3개월간 머무르는 동안 아테네인들은 기아상태에 빠졌다. 그후 그는 스파르타에 대한 항복 조건을 협의할 대표단을 이끌었다.
테라메네스는 보통 '30인 참주'로 불리는 '30인 집행부'를 이끈 지도적 위원이었다.
이 기구는 아테네가 항복한 뒤 리산드로스가 이곳을 통치하기 위해 구성한 정치기구였다. 그러나 집행부의 다른 위원인 크리티아스와 점점 불화가 커졌고 크리티아스는 결국 30인 집행부로 하여금 독약을 내리게 유도해 테라메네스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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