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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0경, 미국 메릴랜드 도체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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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3. 3. 10, 뉴욕 오번 |
국적 | 미국 |
요약 19~20세기 미국의 인권 운동가. 노예로 태어난 그는 1849년 메릴랜드 농장에서 탈출해 북부로 갔다가 1850년 다시 가족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노예 해방 운동을 실천하며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웠다. 1850년부터 1860년까지 비밀조직 ‘지하철도’의 차장으로 해방 시설을 세워 남부의 300명이 넘는 흑인들을 북부로 탈출시켰다. 남북 전쟁 이후에는 가난하게 말년을 보내다가 폐렴으로 1913년에 사망했다.
미국의 인권 운동. 남부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 탈출해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노예제 철폐에 앞장섰다. '지하철도'(노예들을 탈출시킬 목적으로 이루어진 치밀한 비밀조직으로 여러 은신처로 이루어져 있음)의 탈출로를 따라 수백 명의 노예들을 자유로운 북부로 이끈 활약으로 '흑인들의 모세'로 알려졌다. 1849년 메릴랜드 동부 해안에 있는 한 농장에서 탈출해 지하철도의 도움을 받아 북부로 갔다가 1850년 메릴랜드로 다시 돌아와 가족들을 자유로운 북부로 데리고 갔다. 이후 '지하철도'에서 가장 적극적인 '차장'이 되어 빈번히 남부를 드나들며 탈주 노예들을 300명 이상 탈출시켰다. 해리엇 터브먼을 체포하는 데 막대한 현상금이 걸리기도 했다. 터브먼은 항상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에게 군사적 규율을 강조했으며 약하거나 소심한 자에게는 장전된 권총을 들이대어 겁을 주었다.
독실한 그리스도교도로 하느님이 자신에게 힘을 주고 또 자신이 갈 길을 인도해준다고 믿었던 해리엇 터브먼은 당시 유명한 노예제 폐지론자 및 그 동조자들과 친분을 맺었다. 그중에는 랠프 왈도 에머슨, 윌리엄 슈어드,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 리디아 마리아 차일드, 웬델 필립스 등이 있었다. 존 브라운은 편지에서 터브먼에 대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훌륭하고 용감한 사람이다. 우리는 터브먼을 '터브먼 장군'이라 부른다"고 적었다. 남북전쟁 동안에는 간호사·세탁부 등으로 일했으며 북군 간첩으로서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지방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오번에 자리를 잡았다. 많은 훈장을 받았으나 가난하게 말년을 보내다가 전쟁이 끝난 지 30년 만에 북군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정부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1913년 3월 1일, 뉴욕 오번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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