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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조거

다른 표기 언어 泰安漕渠

요약 고려와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조곡(租穀)을 서울로 운반하기 위해 만들었던 일종의 운하.

태안지역은 고려시대 13조창의 하나인 영풍창을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다수의 조창이 만들어졌던 곳이다. 이곳은 당시 삼남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조곡을 서울로 운송하는 조운로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안흥량(安興粱)은 해난사고 빈발지점이기도 했다. 태안군 근흥면(近興面) 안흥(安興) 앞바다는 해지산지의 곡상(谷狀)지형이 발달한 데다가 서해의 외양에 접한 협수로인 까닭에 조류가 험난하여 조운선(漕運船) 항해에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관선조운의 기능이 현저하게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부터 정부는 안흥량을 피하기 위해 태안반도를 육로로 통과하는 방법 또는 태안반도의 특정지점에 운하를 개착하여 직접 조운선을 통과시키는 방법, 사선(私船)으로 대치하는 방법 등을 강구했다. 조운 개착이 이 지역에서 처음 시도된 것은 고려시대인 1134년(인종 12)이었다. 당시의 내시 정습명(鄭襲明)은 군정 수천 명을 동원하여 10여 리를 깊이 파들어갔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그후 1391년(공양왕 3)에 다시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했고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다. 그중 태종연간의 굴포(堀逋) 역사(役事)가 대표적인데 조거지역에 계단식으로 5개의 저수지를 설치하는 등 일단 준공은 되었으나 저수지의 규모가 작아 조운선의 자유로운 통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 유적은 태안읍 인평리·도내리, 그리고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진장리 사이의 태안군·서산시의 경계에 해당하는 지점에 있다. 오늘날 운하 일대는 대부분 논으로 되어 있는데, 특히 연선(沿線)의 가장 높은 지대인 해발 40m의 신털이 봉 좌측면의 지역은 판개골·판곡 등으로 불린다. 판개골 바닥의 평균 표고는 약 15m로 25~30m 너비를 가진 길이 10~15m의 요지(凹地)를 형성하고 있다. 요지로 개착된 운하의 주변은 인공적인 시공 흔적이 지금도 역력하다. 이들 유적은 고려와 조선시대 조운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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