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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로마의 웅변가, 공직자, 라틴어로 글을 쓴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산문 작가, 역사가.
〈역사〉는 69년 1월 1일 갈바 황제 집권 당시(69. 1. 1)부터 96년 도미티아누스의 죽음까지를 다루었다(역사편찬). 이 저서는 12~14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역사〉와 〈연대기〉는 오늘날에는 둘 다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고, 통틀어 30권이었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음). 소(小)플리니우스의 언급으로 미루어보면 105년까지는 몇 권이 이미 완성되었고, 107년쯤에는 집필이 상당한 진척을 보였으며, 109년에는 집필이 끝난 것 같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69~70년을 다룬 제1~4권과 제5권의 일부뿐이다. 이 부분은 갈바와 피소가 오토에 의해 몰락한 사건(제1권), 베스파시아누스가 제국의 동부지역에서 누린 지위 및 오토가 자살하여 비텔리우스에게 길을 열어준 사건(제2권), 비텔리우스가 베스파시아누스를 편든 도나우 군단에 패배한 사건(제3권), 베스파시아누스의 집권(제4, 5권)을 다루고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이지만, 그 원문을 보면 로마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플라비우스 왕조시대를 훌륭하고 체계적으로 기술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타키투스가 직접 목격한 서부 속주의 상황과 도미티아누스 시대 말기의 로마 상황을 다룬 부분은 더욱 뛰어나다. 웅장한 서론 부분을 포함하여 오늘날 남아 있는 서술은 강한 힘을 갖고 있으며, 이처럼 힘찬 글은 산문적인 어조와 색채에도 불구하고 69년 내전 때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잇따라 일어난 사건들을 묘사하는데 가장 적절하다.
이것은 타키투스의 역사 기술의 첫단계에 불과했다. 도미티아누스 시대로 접근함에 따라, 그는 속주와 국경 문제를 제외하고는 일관성이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로마의 정책에 직면했다. 이것은 좀더 날카로운 분석을 요구했으며, 그는 대개 격렬한 반감과 분노 및 신랄한 풍자로 로마의 정책을 분석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말년에 보인 폭정은 귀족정치의 전통을 짓밟았다. 타키투스가 도미티아누스의 평판을 마지막으로 어떻게 자세히 다루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연대기〉에서 티베리우스 황제를 묘사한 부분은 아마 도미티아누스를 묘사하면서 연습한 것에서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타키투스가 책을 쓴 연대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는 네르바 황제시대에 명성을 얻었고, 자유주의 정책의 효과를 누렸다. 동시에 그는 네르바와 트라야누스가 제위를 계승했을 때 일어난 제국정책의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그후 112~113년 속주 총독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아시아 속주 총독이 되어 행정관 경력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는 개인적 경력을 쌓는 동안 권력의 속성을 알게 되었다. 그는 특히 왕조 정치의 결과에 정통했다. 왕조 정치는 베스파시아누스부터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그러했듯이 통치자들을 타락하게 만들고, 통치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을 노예 상태로 떨어뜨리며, 이는 오직 네로의 통치 말기처럼 로마 내부나 국경 수비대의 반란으로써만 상황이 바뀔 수 있었다.
타키투스의 역사관을 암시하는 요소와 더불어 그의 개인적 경력에서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을 분석해보면, 그의 생애에서 지적인 전환이 언제 일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전환기를 거친 뒤, 그는 로마 제국의 본질을 좀더 깊이 탐구하기 시작했다. 〈아그리콜라〉에서 그는 플라비우스 왕조시대를 끝내면 새로운 정권에 대해 계속 기술하겠다고 가볍게 약속했지만, 이제 그는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뒤로 되돌아갔다.
그는 더 이상 현재를 기록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제정정책을 강화했을 때부터 시작된 과거의 정치적 부담을 해석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중요한 사건들을 문학적으로 세밀하게 서술하는 전통적 연감 형식을 채택한 〈연대기〉는 14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티베리우스가 제위에 오른 뒤부터 68년에 네로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의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시대를 다루었다.
이 저서는 18권이나 16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타키투스가 이 책들을 6권씩, 즉 티베리우스에 관한 제1~6권(이것은 다시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를 다룬 제1~3권, 세야누스와 티베리우스를 다룬 제4~6권으로 세분됨)과 칼리굴라(가이우스) 및 클라우디우스를 다룬 제7~12권으로 분류했다는 증거가 있다.
타키투스는 제국의 초기시대로 되돌아갈 때, 이 분야에서 반드시 선배들의 자리를 빼앗고 싶어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선배들의 주제를 이용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선배들의 체계적인 기록을 존중한 것 같다. 그의 주된 목적은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를 비판적으로 다시 해석하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는 황제의 통치가 중앙 정부의 지배력을 강화했고, 이렇게 강해진 중앙의 통제력은 68~69년의 쿠데타 이후에 세워진 플라비우스 왕조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실제로 〈연대기〉는 그가 〈역사〉에서 이미 묘사한 제국의 상황을 더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쓰인 것으로서, 로마의 정치적 자유가 쇠퇴한 원인을 이야기체로 서술하고 있다.
타키투스는 제국의 첫 1세기를 하나의 단위로 보았다. 예를 들어 그는 티베리우스와 도미티아누스의 개인 행동을 비교했는데, 이것은 그 두 사람이 같은 부류의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왕조 권력이 낳은 비슷한 상황이 둘 모두를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로마 제국의 역사를 아우구스투스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그의 책에는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기억이 냉정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근대 세계는 아우구스투스를 로마 제국의 창시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적어도 그가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초기에는 아우구스투스를 공화국을 지배한 마지막 장군으로 생각했다.
〈연대기〉를 쓰기 시작할 때, 타키투스는 참신하고 유능한 사람이 지배력을 얻을 수만 있다면 로마 정부에 주기적으로 강력한 권력자가 등장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인정했다. 이것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귀족주의적 태도였지만, 통치능력과는 관계없이 왕조의 관습에 따라 개인이 권력을 계속 누리는 것은 로마의 전통을 파괴하고 공공도덕을 타락시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장군으로 출발했을지 모르지만, 마지막에는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전제 왕조가 존속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티베리우스의 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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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타키투스의 역사와 연대기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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