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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24경, 비잔틴 테살로니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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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398경, 크레타 |
국적 | 비잔틴 |
요약
비잔틴 제국의 인문주의 학자, 정치가, 신학자.
Demetrios Kydones라고도 씀.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이 정치적 동맹을 맺도록 노력했으며, 그리스 교회와 라틴 교회(가톨릭 교회)의 통합을 주장했다. 라틴 스콜라 철학 사상을 지지하고 그 저작을 번역했으며, 그리스 언어와 문화 연구를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소개했다.
키도네스는 그리스의 고전학자이며 철학자인 닐로스 카바실라스의 제자였다. 1354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대표적 중세철학 신학자들의 저서를 연구했다. 라틴 스콜라 철학에 매력을 느껴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5세기)가 쓴 소논문과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 Summa theologiae〉 등 서방 작가들의 주요저작을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1365년 라틴 교회에서 성직자 서원을 했다.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황제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구스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었다(1369). 아라비아에 대항하는 비잔틴의 힘이 약해지자 1383년경에 은퇴했으며, 1390년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가 베네치아에서 그리스 문화원을 열었다. 베네치아와 피렌체 학생들을 매료시킨 그는 문화교류를 통해 이탈리아 전역에 그리스 언어와 사상을 전파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동·서 유럽의 그리스도교 통합을 추구하는 비잔틴 제국 지성인들 중 핵심인물이었다.
1391년 지난날의 제자였던 황제 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구스의 부름을 받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다시 총리직을 맡았으나, 그가 로마 가톨릭교도인 데 대한 주위의 적대감 때문에 결국 1396년 사임하고 크레타 섬으로 완전히 은퇴했다.
아토스 산의 그리스 정교 수도승들이 설파하고 14세기 금욕적인 신학자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가 구체화시킨 원리로 명상과 끊임없는 기도의 삶을 추구하는 헤시카즘에 대해 동생 프로코로스와 함께 반대했다. 키도네스 형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헤시카즘의 신(新)플라톤주의적 성격에 적용하여 팔라마스를 범신론자라고 비난했으나, 1368년의 그리스 정교 종교회의는 오히려 그들을 비난하고 팔라마스를 성인으로 추증했다.
14세기 비잔틴 제국의 가장 뛰어난 작가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로마 가톨릭 개종을 변론하기 위해 도덕적·철학적 산문인 〈경멸받는 죽음에 관해 De contemnenda morte〉를 썼다. 또한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인 447통의 방대한 서간집을 펴냈다. 그의 〈훈계 Symbouleutikoi〉는 비잔틴 제국이 점차 투르크에 굴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주요한 기록 자료이다. 여기서 그는 투르크의 맹공에 대항하기 위해 비잔틴과 라틴 사람들이 힘을 합칠 것을 촉구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 열렬한 호소문은 1370년 무렵 비잔틴 제국이 절망적인 입장에 처해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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