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852. 7. 10, 뷔르템베르크 슈투트가르트 |
---|---|
사망 | 1912. 12. 30, 슈투트가르트 |
국적 | 독일 |
요약 독일의 정치가·외무장관.
제1차 세계대전 전의 제2차 모로코 위기(1911)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에 참가한 후 법률을 공부하고 1879년 프로이센 외교관으로 입문했다.
비스마르크 이후 강한 독일 외교의 대변자로서 한동안 황제 빌헬름 2세의 총애를 받았으나 1898년 신랄한 직언으로 총애를 잃었다. 이후 부쿠레슈티 공사로 임명되었고 잠시 콘스탄티노플에서 근무하면서 베를린-바그다드 철도건설을 지지했다. 1908년 외무차관에 임명되어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에 뒤이은 위기의 순간에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하지 못하게 막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미 호전적인 외교정책을 주창한 그는 이를 실행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대신 러시아의 적개심을 샀다. 1910년 신임 총리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는 황제의 미움을 받는 키데를렌을 외무장관으로 지명했다.
그는 영국 함대와 맞먹는 규모로 독일 함대를 구축하려는 황제와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의 정책에 반대했고, 그대신 3국동맹(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을 통해 독일의 유럽 주도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1911년 그의 활약은 절정에 달했다. 프랑스는 모로코의 라바트 시와 페스 시를 점령했으나 키데를렌은 모로코에서 프랑스의 우위를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독일에 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모로코 서부지역에 대한 간섭을 촉구하는 독일인들의 선동을 부추기고 자신의 주장을 확고히 하기 위해 독일 전함 '판터호'를 아가디르로 급파해 이른바 아가디르 위기를 초래했다. 그는 프랑스 정부의 타협안을 거절했으며, 협상에서 영국을 제외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영국의 무력개입의 위험을 초래했다.
프랑스가 모로코의 지배권을 갖는 대신 프랑스령 콩고 전역을 양도해달라는 그의 요구가 거절된 후 1911년 11월 독일이 프랑스령 콩고의 영토 2군데를 차지하고 프랑스는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는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독일의 팽창주의자들은 조약이 너무 관대하다며 신랄하게 비난했지만 키데를렌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제2차 모로코 위기중에 오만하고 강압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국제적 긴장을 크게 고조시켰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정치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