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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24. 7. 2, 작센 크베들린부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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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03. 3. 14, 함부르크 |
국적 | 독일 |
요약 독일의 서사시인·서정시인.
그가 보여준 주관주의적 시각은 18세기초 독일 문학을 지배했던 합리주의와의 결별의 지표가 되었다. 대학시절부터 서사시를 써보려고 했던 클로프슈토크는 스위스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 J. J. 보드머가 번역한 밀턴의 〈실락원 Paradise Lost〉을 읽은 다음, 종교적인 주제를 택하게 되었다. 1749년 〈구세주 Der Messias〉의 처음 3편의 노래를 무운(無韻) 6보격으로 써서 발표했는데, 격정에 넘치는 창작방식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시인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하려는 생각에서 라히프치히대학교를 중퇴하고 튀링겐의 랑겐잘차에서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사촌여동생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녀는 그의 송가에서 '파니'로 형상화되었다. 이 사랑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1750년 취리히로 가서 보드머와 함께 6개월 동안 머물렀다.
덴마크의 왕 프리드리히 5세가 그를 코펜하겐으로 초빙해 연금을 주었기 때문에 거기서 20년 동안 체류했다. 1754년 그의 송가에서 '시들리'로 형상화된 함부르크 출신의 마르가레테(메타) 몰러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가 일찍 죽자 그로 인한 슬픔이 그의 창작 활동에 지장을 주었다. 1770년 함부르크로 은퇴해 3년 뒤인 1773년 〈구세주〉의 마지막 5편의 노래를 마지막 영감을 다해 완성했다.
1791년 마르가레테 조카이자 여러 해 동안 가까운 친구로 지냈왔던 요한나 엘리자베트 폰 빈템과 재혼했다. 그의 〈구세주〉는 17개의 언어로 번역되는 등 성공을 거두었으나 클로프슈토크가 명성을 얻은 것은 주로 서정시에 의해서였다. 〈송가 Oden〉의 자유운문형식은 더욱 자연스럽고 표현력이 풍부한 언어 구사를 보여준다. 아울러 그의 송가는 애국적인 주제를 선택하고 게르만족 신화에서 파생된 주제들을 발굴함으로써 낭만주의를 예고했다. 그가 쓴 6편의 희곡 가운데 3편은 고대 게르만족의 영웅인 아르미니우스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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