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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다른 표기 언어 John Fitzgibbon, 1st earl of Clare
요약 테이블
출생 1749, 더블린 근처
사망 1802. 1. 28, 더블린
국적 아일랜드

요약 아일랜드의 대법관.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에 대한 억압 정책을 강력히 지지했으며 1793년부터는 영국과의 통합을 열렬히 옹호했다. 국왕 조지 3세(1760~1820 재위)에게 가톨릭교도의 의회 진출에 동의하는 것은 국왕이 즉위식 때 행한 선서를 스스로 위반하는 것이 된다는 점을 최초로 지적한 인물로 여겨진다.

1778년 아일랜드 하원에 진출했고 1783년 법무장관이 되었다.

1789년 대법관에 임명되면서 피츠기번 남작 작위를 받았고, 1795년 다시 클레어 백작작위를 받았다.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아일랜드의 애국파 정치가인 헨리 그래튼에 반대했으며 그래튼이 제안한(1787~89) 아일랜드의 토지 십일조세 개혁안을 좌절시켰다. 영국 내각이 아일랜드 정부에 압력을 가해 제정된 1793년의 가톨릭교도 구제법이 통과되도록 도왔지만 이 법안에 따른 정책에는 반대했다. 급진주의 운동을 가혹하게 제한하는 집회법(1793) 제정에 앞장섰으며, 1798년 반란에 대해 정부가 강경하게 대응하자 이를 옹호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잔인하거나 극단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개인을 대할 때는 인정을 베푸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1793년부터 영국과 아일랜드 의회 통합의 필요성을 확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때문에 가톨릭교도 해방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1798년 10월 잉글랜드로 건너가 소(小)윌리엄 피트 총리에게 자신의 견해를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1800년 2월 10일 클레어는 영국 상원에서 길고도 강경한 어조의 연설을 통해 의회 통합 결의를 제안했다.

이 연설에서 그는 1688년 이후의 아일랜드 역사를 돌이키면서 최근의 불행한 사건들을 1782년에 제정된 독립 헌법의 탓으로 돌렸으며, 신랄한 개인적 감정이 담긴 말로 그래튼을 비난했다. 그는 아일랜드 총독인 콘월리스 경이 가톨릭교도들에게 의회 통합과 더불어 가톨릭교도의 해방도 함께 이루어질 것임을 확약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법이 통과된 뒤에 그는 배신당한 사실에 크게 불만을 토로했다. 통합법 제정 이후 그는 아일랜드에 양보하는 정책은 무엇이든 반대를 하는 등 더욱 과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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