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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91, 프랑스 아키텐 코레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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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352. 12. 6, 프로방스 아비뇽 |
요약 교황(1342~52 재위).
본명은 피에르 로제. 프랑스 페캉과 라셰즈디외의 베네딕토 수도회 대수도원장이었던 클레멘스는 1329년 상스, 1330년 루앙의 대주교가 되었다. 1338년 교황 베네딕토 12세에 의해 추기경이 되었고, 그의 뒤를 잇는 계승자가 되었으며, 1342년 5월 19일 아비뇽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교황 임기 동안 십자군 전쟁의 지속, 피렌체 은행가들의 몰락, 이탈리아 내 교황청의 점유라는 세 가지 문제에 직면했다.
클레멘스는 교황의 첫번째 임무로 오스만 투르크족에 대항하기 위해 십자군을 고려했다. 1344년에 그는 동지중해에서 해적의 습격을 끝내기 위해서 스미르나(현재 이즈미르)를 차지하려고 했던 십자군 해군 원정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스미르나 문제는 그 당시 기사 요한네스에게 임무를 위임했었다. 피렌체의 파산은 클레멘스가 은행가들을 다른 곳에서 찾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세입의 부족이 아니었다.
로마냐와 마르케와 같은 이탈리아 지역 교황의 영토는 이탈리아 귀족 가문들이 서로 가지려고 경쟁을 했다. 클레멘스는 로마냐에서 교황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그의 조카 아스토르주 드 뒤르포르를 급파했다. 나폴리의 여왕 조반나 1세가 남편 안드레아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았을 때, 안드레아의 남동생인 헝가리의 대왕 루이 1세는 나폴리에 대항하여 원정을 이끌었다. 조반나는 그녀의 고향인 프랑스 아비뇽으로 피신하고 클레멘스의 보호를 요청했다. 1347년 로마에서 클레멘스는 처음에 민중 지도자인 콜라 디 리엔초를 지지했다. 콜라는 고대 로마 공화국에 기반을 둔 나라를 만들려고 분투했 다. 그러나 후에 교황은 그를 추방했다.
클레멘스는 교황과 동맹을 맺은 독일 제국의 왕 카를 4세가 1346년 선거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수도원의 청빈 서원을 그만두었으며 완전한 물질의 빈곤을 추구했던 프란치스코 수도회 내의 극단주의자들인 영성파에 대항했다. 교황청을 확장하면서 그는 교구에 거주하는 왕자처럼 살았고, 화가들과 학자들을 후원했으며, 그의 궁정을 그 당시 가장 화려한 궁정들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1348년부터 1359년까지 흑사병이 돌면서 클레멘스를 따르는 사람들의 4분의 1이 아비뇽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역병을 퍼트린 진원지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을 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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