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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반나치 및 친(親)이스라엘 활동을 펼쳐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친 부부.
독일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난 베아테 클라르스펠트(결혼 전 성은 Kunzel)는 21세 때 베를린에서 종사하던 비서직을 그만두고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왔다. 그곳에서 세르주 클라르스펠트를 만나 1963년에 결혼했다. 유대계 프랑스인인 세르주는 나치 치하에서 고통을 겪었다.
1943년 아버지가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자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프랑스의 니스로 피신했다. 아버지는 결국 아우슈비츠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세르주는 1950년대 소르본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파리대학교에서 법학사학위를 취득했다. 파리대학교 정치학연구소에서 연구활동을 하던 중 베아테를 처음 만났다. 세르주는 1953년 이스라엘의 집단농장 키부츠에서 일했으며, 1959년에는 〈이스라엘의 협동경제〉라는 주제의 논문을 썼다. 1966년 아우슈비츠를 방문했고, 1967년에는 이스라엘 '6일전쟁'에 지원병으로 참전했다.
B. 클라르스펠트는 1967년 좌파 일간지인 〈콩바 Combat〉에 기고한 일련의 글을 통해 쿠르트 키진거 당시 서독 총리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선전원으로 활약했다고 비난했다. 그녀는 1968년 키진거 총리가 연설하는 한 집회에서 키진거 총리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그녀는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수년 간 클라르스펠트 부부는 다른 나치 당원들과 전시 부역자들의 과거를 폭로함으로써 당시 고위직에 있던 일부 인사들을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이들은 또 나치 전범자들을 기소하도록 당국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는 쿠르트 리슈카, 헤르베르트 하겐, 에른스트 하인리히존, 장 르게, 베르너 베스트, 구스타프 리히터, 테오도르 간체뮐러, 알로이스 브루너, 그리고 가장 잘 알려진 클라우스 바르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부부가 반나치 운동과 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베아테는 여러 차례 체포되었으며, 짧은 기간이지만 실형을 살기도 했다. 또한 죽이겠다는 위협을 여러 차례 받았으며, 그들의 자동차가 폭발된 사건도 있었다.
동시에 베아테는 아랍인들의 '잔학성'을 비난하는 한편, 이스라엘의 평화적 생존을 보장할 것을 아랍측에 촉구하면서 다른 곳은 물론 라바트·다마스쿠스·베이루트 등 여러 아랍 국가의 수도에서도 시위를 기도했다. 거의 매년 여름 클라르스펠트 부부는 1개월 가량을 이스라엘의 여러 키부츠에서 보냈다. 이들 부부는 비영리 재단인 '베아테 클라르스펠트 재단'으로부터 활동 자금을 지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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