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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인 증거, 특히 쿠웨이트 만 파일라카 섬에서 발견된 증거에 의해 쿠웨이트는 수메르와 인더스 강 유역(BC 3000~2000)과 동시대에 속한 고대 문명지의 일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시들과 교역 중심지 딜문(지금의 바레인으로 알려진 곳)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파일라카 섬은 BC 1200년경까지 번영하다가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시대(BC 323경)에 그리스 식민지 개척자들이 파일리카 섬에 들어와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는 신전을 세웠다. 파일리카 섬은 셀레우코스 왕조로 넘어갔으나 로마 시대에 쇠퇴했다.
18세기초 아라비아 중부지역의 아니자족은 더 좋은 목초지와 물을 찾아 동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들은 쿠웨이트 시를 세웠는데,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시를 세운 연대는 1710년이라고 한다. 이어 1756년 알 사바흐 가문의 아보트 라힘을 수장으로 하는 자치 토후국이 건설되었다. 사바흐 왕가는 지금까지 쿠웨이트를 지배하고 있다.
쿠웨이트가 처음으로 유럽 강대국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세기말로서 독일이 베를린-바그다드 철도를 쿠웨이트 항까지 연장하려고 애쓰던 때였다. 독일과 오스만 제국의 영향을 막기 위해 영국과 쿠웨이트는 1899년 영국에게 쿠웨이트의 외교권을 넘겨준다는 내용의 조약을 맺었다. 1914년 영국-터키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은 쿠웨이트에 보호령을 설치했다.
나지드(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는 1922년 타협적인 중립지대 설치를 포함한 알우카이르 조약을 맺어 해결되었다. 1923년에는 이라크와 북쪽 국경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1961년 6월 영국 정부는 쿠웨이트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했다. 이에 대응하여 이라크는 쿠웨이트 전체가 이라크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쿠웨이트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며, 1961년 6월 20일 아랍 연맹이 쿠웨이트 독립을 승인함으로써 이라크의 주장은 수그러들었다.
쿠웨이트는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전형적인 중립·중재 정책을 폈다. 그러나 1980년에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페르시아 만의 석유 선적뿐만 아니라 쿠웨이트의 안보도 위협했고, 쿠웨이트는 1980년대 내내 많은 차관을 제공하여 암암리에 이라크를 지지했다. 그러나 전쟁 채무상환과 다른 여러 가지 문제들에 관한 협상이 결렬된 후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는 이라크군에게 침공·점령당했고, 쿠웨이트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로 옮겨졌다(→ 걸프 전쟁).
한편 이라크군은 조직적으로 쿠웨이트 자산을 약탈했다. 국제연합(UN)은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몰아내기 위해 미국이 주도하는 대(對)이라크 통상금지조치를 승인했으며, 11월 29일 동일한 목적으로 이라크에 대한 무력사용을 승인했다. 1991년초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은 1개월 동안 이라크에 대한 공중폭격을 감행한 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작전을 시작, 2월 23~27일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몰아냈다. 몇 주일 후 쿠웨이트 망명 지도자들은 수도 쿠웨이트 시로 돌아왔다. 이라크군이 퇴각하면서 전국의 1,300개 유정 가운데 절반 이상을 파괴하여 초기의 재건 노력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많은 유정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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