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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46. 9. 25,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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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0. 6. 22, 오스트리아 그라츠 |
국적 | 독일 |
요약 독일의 기상학자·기후학자.
세계 기후구(氣候區)의 도식 및 기후도(氣候圖) 작성으로 잘 알려졌다.
그는 70년 이상 동안 기후학과 기상학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실용적인 면과 이론적인 면에 있어 그의 연구 업적은 대기과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쾨펜은 20세까지 러시아에 거주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러시아의 공중위생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캐서린 황후에 의해 러시아로 초청된 독일의 의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후에 러시아 황제의 주치의가 되었다. 쾨펜의 아버지 페터 폰 쾨펜(1793~1864)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리학자 겸 통계학자이자 사학자로 활동했는데, 러시아 문화에 미친 공적을 인정받아 알렉산드르 2세(1855~81 재위)로부터 학자로서는 최고위인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1858년 크림 지역의 남해안에 있는 커라바흐라는 해안토지를 하사받았다. 아버지의 학자로서의 성공과 다재다능함은 어린 나이의 쾨펜에게 크림 지역의 다양한 환경에 대한 인지력과 사고력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흑해(黑海) 연안을 따라 나타나는 낮은 산맥의 복잡한 지리는 최초의 탐사대상이었다.
그는 커라바흐에서 북쪽으로 48㎞ 정도 떨어져 있으며 연안 산맥이 넓은 평원으로 펼쳐지는 지점에 위치하는 심페로폴에 있는 중등학교에 다녔는데(1858~64), 바닷가에서부터 산길을 따라 내륙 쪽으로 자주 걸어다녔다. 그는 후에 당시 이 지역에서 보고 느낀 풍부한 식물군과 다양한 기후로 인해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식물계의 지리 및 식물과 기후와의 관계에 대해 최초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1864년 쾨펜은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식물학을 전공하면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수시로 커라바흐를 왕래했는데, 이때 관찰한 북쪽의 어두운 삼림지역과 크림의 아열대성 해안지역 사이에서 관찰되는 환경의 차이는 그의 지리학적 사고의 폭을 넓혀주었다. 1867년 쾨펜은 하이델베르크대학교로 옮겨 식물성장과 온도와의 관계를 연구해 1870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지나칠 정도로 완전무결한 사람이라는 것은, 하이델베르크대학교의 마지막 시험중에도 여행을 계속하겠다는 그의 강력한 주장에서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교수들은 그의 편의를 보아주고 시험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라이프치히대학교로 시험감독을 파견하기도 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 동안에는 야전위생대에서 근무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중앙자연관측소의 연구조원으로 일했다. 3년 뒤에는 함부르크에 있는 독일해군관측소에서 기상전문(氣象專門)·폭풍경보체계·해양기상 등을 담당하는 신설부서의 장으로 임명되었다. 1879년 관측소에서 새롭게 기상학자의 자격을 얻었으며, 1884년에는 극지방에서 열대지방에 걸쳐 각각 연평균 온도값을 기준으로 그 이상과 이하의 온도를 갖는 달의 수에 의해 구별하는 세계기온도를 작성했다(기후도). 1900년 그는 기후분류에 있어 수학적 체계를 도입해, 지리기후학의 최고 발전기를 맞게 되었다.
온도와 강우량에 따라 기후에 수학적인 값을 할당하고, 이에 따라 각각을 5가지 기후형으로 분류했다. 그후 다른 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많은 분류체계들은 쾨펜의 연구에 기초를 두고 있다(쾨펜의 기후구분). 1919년 함부르크 관측소를 그만두고, 1924년 오스트리아의 그라츠로 갔다. 1927년에는 루돌프 가이거와 함께 5권으로 기획된 〈기후학 입문 Handbuch der Klimatologie〉 편집에 착수했는데, 그는 이 책이 거의 완성될 무렵에 죽었다.
쾨펜의 지적 융통성은 그의 화려한 경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넓은 분야의 지식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며 새로운 사상과 방법론,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 과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새로운 것들을 빈틈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젊은 과학자들은 그가 열성적·건설적인 청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폭넓게 여행하지 못했지만 세계에 대해 상당히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연구결과와 비전문적인 관심사를 전세계적인 안목으로 보게 되었다. 그의 동포에 대한 깊은 관심은 토지이용 개혁, 학교체제 개혁, 사회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양부족 개선, 알코올 중독, 달력의 개혁 등에 관한 문제 해결을 위해 그가 바친 시간과 정열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그는 세계평화를 위해 에스페란토를 국제공용어로 사용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그 자신도 에스페란토를 독일어나 러시아어만큼 유창하게 했다. 1868~1939년에는 500편 이상의 출판물을 저술했는데, 그중 일부는 에스페란토로 번역했다.
쾨펜은 어린이들을 사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함부르크에 있는 아임스뷔틀러 소년원의 설립자이며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어린이들을 위해 일했다. 그는 아내와 5명의 자녀 외에도 아버지를 여읜 조카들을 돌보았다. 러시아 학생들이 독일로 망명했을 때 그는 함부르크에 그들의 숙소를 마련해주었으며, 후에는 그들 중 몇 명이 미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쾨펜은 평범했지만 고귀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름 앞에 폰(von)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이어받았으나 이것의 사용을 삼간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명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피했고, 3등칸의 기차를 이용해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쾨펜은 박식한 한 사람이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역량을 가지고 중요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시대의 마지막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같은 시기의 학자들 가운데 특히 뛰어났던 그는 20세기의 전문과학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길을 닦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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