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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55년까지 칼뱅은 이 교회제도가 제대로 운영되도록 많은 정력을 쏟았다.
그는 이 제도에 대한 제네바 주민들의 지지를 얻고 이 제도의 일상적인 운영을 감독하기 위해 애썼다. 같은 기간에 그의 교리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도 싸워야 했는데 그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제롬 볼세크와 미카일 세르베투스의 반론이었다. 과거에 가톨릭 신학자였던 볼세크는 1551년 칼뱅의 예정론이 하느님을 악의 장본인으로 본다고 주장하며 칼뱅의 예정론을 공공연하게 공격했다. 이에 격분한 칼뱅은 다른 도시에서 활동하는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 비판을 반박했고, 볼세크는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스페인의 박사였던 세르베투스는 핵심적인 그리스도교 교리인 삼위일체론(한 분이신 하느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된다는 믿음)을 공격하는 책들을 출판했다. 1553년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왔을 때, 칼뱅은 그를 체포하고 외국 신학자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그를 이단으로 고발했다. 그뒤 세르베투스는 화형에 처해졌다. 이 2가지 경우 또는 이와 비슷한 경우에도 제네바 정부는 칼뱅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신학적 적대자들에 대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뒤, 칼뱅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른 나라들에 개혁파 프로테스탄트를 전파하는 데 더 많은 정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이전에 그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츠빙글리가 이끌던 프로테스탄트(이 시기에는 취리히의 하인리히 불링거가 이끌었음)와 이미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1549년 공동신앙고백(Consensus Tigurinus)이 채택되면서 결성되었고, 1552년 이후 칼뱅과 츠빙글리 진영에 속한 보수주의적인 루터파 신학자들, 특히 함부르크의 요아킴 베스트팔과 하이델베르크의 틸레만 헤스후지우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진행되면서 한층 강화되었다.
1555~64년 프로테스탄트 확산에 대한 칼뱅의 관심은 대부분 조국인 프랑스에 집중되었다. 그의 감독 아래 수십 명의 프랑스 망명자들이 개혁교회 목사로 훈련받았고, 이들 중 상당수가 프랑스어권 스위스에서 교사나 시골 목사가 되기 위한 실제적인 훈련을 받았다. 그뒤 그들은 프랑스로 잠입했다. 1562년 프랑스 왕이 칼뱅주의에 대한 관용 조칙을 내릴 때까지 그들의 프랑스 체류는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활동을 공고히 하기 위해 칼뱅은 프랑스 전역에 걸친 지하 교회 조직망을 결성하도록 지원했다. 지역교회는 제네바 교회의 모델에 따라 세웠고, 지역 차원에서는 목사들과 장로들이 참여하는 대의기구('교무회'라고도 함)를 세웠다.
나중에 다른 나라에서 생겨난 이와 비슷한 기구가 바로 스코틀랜드와 아메리카의 장로회 및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클래스이며 이들은 칼뱅파 프로테스탄트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관들 가운데 하나이다. 지방 차원에서는 교무회 위에 대의기구적 성격을 갖는 노회가 생겨났다. 이렇듯 다양한 체계를 통일하기 위해 전국 단위의 교회회의가 만들어졌는데, 전국 교회회의는 1년에 1번씩 모이도록 되어 있었다.
제1차 전국 교회회의 모임은 1559년 박해를 일삼던 왕립 정부의 바로 코앞인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그곳에서 전국 교회회의는 전국적인 차원의 신앙고백과 훈련장전을 채택했다. 칼뱅이 살아 있는 동안 제네바의 목사동우회는 전반적인 체계를 관장하는 최고법정 역할을 했다. 목사동우회는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고, 장로회의나 장로회가 해결할 수 없는 논쟁을 해결해 주었다.
급속히 성장하는 개혁교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칼뱅은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유력한 프랑스 귀족들과 접촉하면서 태동중인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후견자가 되도록 권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은 프랑스 왕가와 혈연관계에 있던 부르봉 가문 사람들, 특히 이 가문의 우두머리인 나바라 왕 앙투안 드 부르봉, 그의 부인 잔 달브레, 그의 남동생이요 콩데의 초대 백작이던 루이였다. 유력하고 재력 있는 샤티용 가문의 콜리니 3형제(오데, 가스파르, 프랑수아 당데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 귀족의 도움으로 프랑스 칼뱅주의는 강력한 보호를 받았지만, 이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 공공연하게 도전하는 운동에 연루되기도 했고 이 운동은 급기야 종교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칼뱅은 1560년 콩데의 수행원들 가운데 일단의 피끓는 청년 귀족들이 젊은 왕을 납치하고, 왕의 자문이던 보수적인 가톨릭 참모들을 살해하고자 한 암부아즈 음모 등 전쟁을 향해 치닫는 사건들을 막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1562년 콩드가 직접 왕립 정부와 싸우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을 때는 효과적인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그를 지원했다. 칼뱅은 베자가 콩데의 고문·선전자·외교관으로 활동하는 것을 허락하기도 했다.
칼뱅과 제네바 목사동우회는 다른 나라의 개혁파 운동을 위해서도 온건한 형태이지만 비슷한 지원활동을 벌였다. 이탈리아·잉글랜드·스페인 망명자 집단들은 제네바에서 환영받았고, 그들 나름의 지역 교회를 설립하도록 허락받았다. 네덜란드와 여러 독일 영지, 폴란드, 그밖의 나라에서 온 개인들도 환영을 받았다.
이들이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서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칼뱅은 서신을 통해 이들과 계속 접촉을 가졌다. 또한 그가 생각하기에 프로테스탄트 복음전도 활동을 지원할 가능성이 있는 정부관리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책을 헌정했다. 또한 새로운 개혁교회들이 조직되고 다른 프로테스탄트 집단과 가톨릭 집단의 공격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하도록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칼뱅의 이러한 활동으로 제네바는 개혁파 프로테스탄트의 중요한 국제본부가 되었다. 제네바가 때로 '프로테스탄트의 로마'라고 불리기도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1560년대에 칼뱅은 심각한 건강문제에 직면했다. 제네바와 국제 개혁파 운동과 관련해 맡고 있던 칼뱅의 직무는 후임자로 유력시되었던 베자와 다른 사람들에게 점차 맡겨지게 되었다. 그는 1564년초까지 설교·강의·집필 등을 계속하다가 그해 5월 27일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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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칼뱅의 신학 논쟁과 개혁파 프로테스탄트의 확장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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