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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남북전쟁 당시 미국에서 전쟁에 반대하고 남부와의 협상 타결을 통해 연방을 되살릴 것을 주장했던 북부의 시민들을 경멸적으로 일컫던 말.
Peace Democrat라고도 함.
카퍼헤드('독사')라는 말은 1861년 7월 20일 〈뉴욕 트리뷴 New York Tribune〉지가 이들을 소리 없이 다가와 공격하는 뱀에 빗대어 언급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민주당원이었으나 북부의 민주당원들이 모두 카퍼헤드는 아니었다. 이들은 주로 남부 출신들이 많이 살고 있는 중서부 지방(오하이오·인디애나·일리노이)에서 세력이 강했다. 농업에 이해관계를 두고 있는 이 지방의 주민들은 산업주의자들이 공화당과 연방정부를 점차 지배해나가는 것에 반감을 품었다.
이와 더불어 징병과 노예해방에 반대하는 집단들, 특히 해방된 남부의 흑인 노예들이 북부로 몰려와 일자리를 빼앗아갈 것을 염려한 뉴욕 시의 아일랜드계 주민들이 카퍼헤드의 지도자들인 호레이쇼 시모, 페르난도 우드, 클레멘트 L. 벌랜디검을 지원했다. 또한 시민의 자유를 폐지하는 링컨의 정책에 반대한 사람들이나 단순히 대량 유혈사태가 끝나기를 원하는 사람들로부터도 지지를 끌어냈다. 1862년 이들은 '황금원 기사단'(The Knights of the Golden Circle)을 조직했고 이 단체는 '아메리카 기사단'(The Order of American Knights)과 '자유의 아들들'(The Sons of Liberty)로 발전했다. 공화당은 이들 단체가 국가 전복 활동을 꾀한다고 고발했으나 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거의 없었다. 이들은 대부분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활동에 참가하기보다는 민주당을 유지하고 공화당 공직 후보자들을 패배시키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한편 이들은 인디애나 주정부에서 중요한 전쟁 관련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으며 일리노이 주에서는 주 하원을 한동안 지배하기도 했다. 시모는 1862년 뉴욕 주지사가 되었고 벌랜디검도 1863년 오하이오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864년 열린 민주당 전국대회에서 정당 강령 작성의 주도권을 잡은 이들은 전쟁을 실패로 규정하는 항목을 삽입하고 즉각적인 평화협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지 매클렐런은 이 평화 조항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대부분의 북부지방에서는 민주당원과 카퍼헤드라는 말이 완전히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때문에 카퍼헤드들이 사실상 전쟁의 수행이나 결과에 대해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또한 대부분의 북부 민주당원들이 링컨과 그의 전쟁 수행노력을 지지했는데도 불구하고 애퍼매턱스에서 남군이 항복한 뒤 수십 년이 지나도록 계속해서 민주당에는 국가에 충성스럽지 못한 정당이라는 오명이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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