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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일본 제국주의의 국권 침탈과 식민 통치에 협력하며 항일 운동의 방해 등 반민족행위를 행한 자들을 부르는 말. '친일'이라는 표현은 구한말부터 사용되었으나, 반민족, 매국의 뜻을 갖는 부정적 의미로는 을사늑약 이후 사용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1948년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구분했고, 2004년에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정해 그 의미를 다시 규정했으며, 2009년에는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어 친일파에 해당하는 자들을 밝혔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 친일파에 속하는 자들의 범주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개요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일본제국주의의 국권 침탈과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한 자들을 일컫는 말. '친일반민족행위자(親日反民族行爲者)', '부일파(附日派)'라고도 한다. '친일파'라는 말의 의미와 범주, 적용 범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다. 친일파는 크게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력한 자와 반민족행위를 행한 자로 나뉘며, 친일 행위에 따라서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협력하거나 식민통치기구에 참여한 자, 항일운동을 방해한 자,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 등이 포함되고, 흔히 사회적 신분에 따라 지주·자본가, 지식인, 경찰·관료·군인 등으로 분류된다.
개념의 역사
'친일파'라는 용어는 이미 대한제국의 성립을 전후하던 시절부터 사용되어 왔다. 당시 '친일파', '친일개화파'는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을 개혁의 모델로 삼았던 정치 집단을 의미했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친일파'의 의미는 일본 제국주의에 앞장서서 민족을 배반하여 자신의 일신 영달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광복 이후인 1948년에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서는 일본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협력한 자,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시책을 수행하는 데 협력한 자, 독립을 방해하는 활동을 행한자 등을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면서 '친일파'에 속하는 범주를 상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친일파'라는 용어는 현대 한국에 있어 '친미파', '친독파'와 같은 순수한 의미의 수사학적 표현이 아니라, 민족의 안위에 피해를 끼친 자들을 의미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고유한 역사적 용어로 정착되었다. 그럼에도 '친일파'라는 용어의 기준이나 범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한 자뿐 아니라, 당시의 사회 체제 안에서 생존을 위해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인 협력을 한 자들도 친일행위에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2009년 발행된 <친일인명사전>에서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에 일정 지위 이상으로 참여하거나 활동한 자, 일제 식민 통치에 협력하는 단체에 참여하거나 밀정 행위 등으로 항일 운동을 방해한 자. 일제의 징용이나 공출에 적극 협력하거나 위안부의 동원, 다액 금품의 헌납 등으로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한 자. 지식인·종교인·문화예술인으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 등을 친일파로 분류하고 있으며, 다만 이에 해당하더라도 뒤에 뚜렷한 반일 행적이 확인되는 자는 제외하고 있다.
분류
친일파는 친일행위의 성격에 따라 크게 지주·자본가, 지식인, 경찰·관료·군인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 중에는 자진해서 친일을 한 자도 있고, 피동적으로 친일을 한 사람도 있었다. 친일 지주·자본가들은 국방비, 비행기 및 금품헌납, 총독열전각(總督列傳閣) 건축 등 친일활동을 하는 한편 도·부·읍·면 의원이 되어 일제가 조선을 쉽게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 임전보국단·총력연맹·시국대책조사위원회 등의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친일을 선동함으로써 일제의 수탈에 동조했다. 이들은 친일행동을 자발적으로 수행하기보다는 그들의 계급적 이익과 식민체제 속에서 수동적으로 자행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민족사회의 지성을 대표하는 지식인들 중에 친일행위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문예회·조선문인협회·조선임전보국단·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의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이들 단체가 주최하는 각종 행사에 참가하여 지원병·학병 지원을 선동하고 강연·방송·좌담회·담화발표 등을 하여 내선일체·황도정신 고취, 총력체제의 생활화나 내핍을 강조했으며, 한편으로는 시·소설·수필·논문 등의 친일작품을 썼다. 또한 유명 미술가들 중에 일제의 전시체제에 맞추어 전쟁동원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림을 그리는 친일미술파가 등장했다. 이러한 지식인의 친일행위는 국민의식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친다는 데서 지주, 자본가나 경찰, 관료·군인의 친일행위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랐다.
한편 일제식민체제의 상징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친일계층인 경찰·관료·군인이 있었다. 일제에 의해 식민통치의 말단집행요원인 경찰로 충원된 조선인들은 식민정책, 즉 민족말살정책과 민중수탈정책을 직접 집행했다. 즉 일제의 손발이 되어 조선인에 대한 인적·물적 수탈을 할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사상범 등의 검거·색출·투옥·고문을 자행했는데, 이는 일제가 직접적인 악행을 조선경찰의 손에 의해 저지르게 함으로써 민족분열을 도모하려는 정책에 말려든 결과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친일을 한 관료층으로는 고등문관 출신의 고급관료와 면장·면서기 등 말단관료로 나눌 수 있다. 고등문관 출신의 관료는 주로 군수·변호사·검사 등을 하면서 식민체제에 기생하는 존재로서, 고등경찰과 함께 친일파의 대표적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말단 면장·면서기 및 동회직원들은 경찰과 협조하여 식민통치의 인적·물적 수탈정책을 직접 수행했다. 또한 일본군인이 된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민족의식이 있거나 독립운동과 연계를 맺으며 활동한 사람도 있었다.
광복 후의 동향
8·15해방 후 중간파나 좌파는 자주민주국가 건설을 위해 친일파의 척결 또는 배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런 반면 우파는 주권을 찾고 정부가 안정된 후에 처단하자는 시기상조론, 세금을 낸 모든 국민이 친일을 한 것과 같으며 대다수 친일파도 생계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했을 뿐이라는 식민지환경론, 국가건설에 친일인재의 전문기술과 능력이 필요하다는 친일인재유용론, 전범자는 전승국인 연합국만이 규정하고 처벌할 수 있다는 법적·논리적 불가론, 친일파 처단은 민족을 분열시키고 사회적 혼란을 가져온다는 민족분열론 등을 주장하며 친일파의 척결에 반대했다.
친일파 척결에 대한 여론이 높아지면서 1947년 7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은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통과했으나 이 법안은 미군정의 강력한 반대로 포고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1948년 8월 제헌국회에서 다시 거론되어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10월 국회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하여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승만과 경찰에 의해 계속 방해당했고, 결국 1949년 5월 국회 프락치 사건, 6월 현직 경찰간부의 구속에 대항하여 경찰의 반민특위습격사건 등을 겪으면서 와해되었다.
9월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친일파 척결작업은 일단 막을 내렸다. 반민특위가 실제로 활동한 것은 1949년 1월부터 공소시효기간 마감인 8월까지로, 총취급건수는 682건, 검찰부의 기소건수는 221건, 재판부의 판결건수는 40건이었다. 그중 징역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은 14명에 불과하며, 이들도 1950년 봄까지 재심청구 등으로 감형되거나 형집행이 정지되어 모두 석방되었다.
친일파들은 해방 후에도 거의 척결되지 못하고 대부분 새로 들어선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즉 자본가·지주들은 친일파 척결, 토지개혁 등을 주장하는 사회변혁 세력과의 투쟁에서 이기고 자신들의 이익과 생존을 지켰다. 친일지식인들도 해방 후 한민당을 결성하여 보수 우익세력으로서 좌익세력과 투쟁하여 사회변혁 세력을 제압하고 정치·사회·문화 모든 방면에서 실권을 차지했으며, 친일미술인들은 비중있는 유명미술인으로 존재했다.
또한 식민지체제에서 가장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경찰·관료는 해방 후에도 처형되지 않고 오히려 미군정기에 다시 경찰로 충원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이승만 정부에 의해 다시 받아들여짐으로써 지배적·실권적 지위를 차지했다. 1960년 5월 7일자의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전국 경찰 총경의 70%, 경감의 40%가 일본경찰 출신이었다고 한다. 또한 제1공화국의 친일협력자를 보면 각료의 31.3%, 대법원의 68.4%였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군인도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서 군부 내의 지배적·실권적 위치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친일파는 척결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권력과 금권력을 배경으로 점점 확고한 위치를 굳혀갔다. 이러한 사실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국가의 명분이 제대로 설 수 없게 하며, 민족정기 확립에 해악을 끼쳤다. 또한 이들은 국가의 핵심적 세력으로 존재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을 주도해감에 따라 우리나라의 참된 민주발전과 경제발전을 저해하며 파행적인 정치·경제·사회 발전을 주도해갔다.
문민정부 수립 이후, 이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계속되면서 '친일파'에 대한 범정부적 정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2004년 3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2005년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하여 2009년까지 총 1,005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명단을 발표했다. 같은 해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었으며, 이 사전에서는 보다 실증적인 역사적 자료 확인을 통해 '친일파'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선정하고 그 친일반민족행위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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