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중국의 현대화

다른 표기 언어

개요

1910년대 중반부터 1949년에 이르는 격동의 30년을 중국에서는 신민주주의혁명 시기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실패로 끝난 구민주주의 혁명, 즉 신해혁명에 대비하여 이 시기 중국혁명을 주도해나간 중국공산당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말이다. 사실 중국공산당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이후지만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설된 이후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를 주요과제로 하던 중국혁명에 영향을 끼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신문화운동

학자와 일부 정치가들은 민국 초기의 어두운 정국 속에서도 문화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중국사회를 개조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을 신문화운동이라고 하며, 잡지 〈신청년 新靑年〉과 베이징대학교가 이 운동의 중심을 이루었다. 〈신청년〉은 1915년에 창간되어 중국 청년들에게 개인의 자유와 평등, 과학적 정신을 고취시키며 중국 사상계를 선도했다. 〈신청년〉의 창간자인 천두슈[陳獨秀]는 봉건적인 윤리와 가족제도를 비판했고, 후스[胡適]와 루쉰[魯迅]은 백화문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베이징대학교에서는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리다자오[李大釗]를 비롯한 진보적 지식인들을 받아들여 이곳을 신문화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열린 파리 평화회의에서는 산둥 성에서 차지했던 독일의 권익을 일본 측이 넘겨받는 것을 승인했다.

중국 청년들은 사상혁명에 자극을 받아 정치적으로 눈을 뜨게 되어 베이징에서 파리 평화회의의 결정에 항의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상하이 등의 여러 도시로 확대되었고, 상인과 노동자들의 파업에 이어 시민들의 일본 상품 배척운동이 전개되었다. 정치운동과 사상적·문화적 개혁운동이 함께 일어났던 5·4운동은 대중적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운동의 기점이 되었다. 1920년 여름 베이징 정부를 장악한 직례파(直隸派) 군벌이 자유화정책을 취하자, 언론활동이 활발해지고 각종 외국사상들이 번역·소개되었다.

미국의 실용주의,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외국의 선진사상들이 많이 소개되었는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 학회들이 만들어졌다. 리다자오와 천두슈는 코민테른 극동부장 보이틴스키를 만나 공산주의청년단을 만들고 이것을 기반으로 중국공산당 창설작업에 들어갔다. 1921년 제1회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후 약 2년간 중국공산당은 주로 당원 확보와 마르크스주의의 선전에 주력했다.

또한 반제국주의적·반군벌적인 국민혁명의 필요성을 대내외적으로 역설하고, 철도와 공장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조직에 힘을 기울였다.

제1차 국공합작

창당 초기에 계속되는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던 중국공산당은 국공합작을 제안한 마링의 권고에 따라 국민당과 제휴할 것을 결정했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광둥 성에 혁명정부를 조직한 쑨원은 1923년 국민당 개조선언과 당의 강령초안을 발표하여, 연소(聯蘇)·용공합작(容共合作)·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을 명시했다. 또한 1924년초 공산당원을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받아들였다. 장제스[蔣介石]는 소련에 가서 소련군의 편제를 배우고 돌아와 황푸[黃埔]에 군관학교를 설립, 장교를 양성하고 이들을 중핵으로 국민혁명군을 조직했다.

1925년 5월 30일 상하이에서 영국인 경찰의 발포 명령으로 중국인 파업 노동자들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상하이에서는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6월 23일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황푸 군관생도들 사이에 교전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를 냈고, 공산당에 의해 지도된 파업은 16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국민당은 국민적 지지를 얻게 되어 1926년 1월 당원수가 2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1925년 5월 1,000명에 불과하던 공산당의 당원수가 1925년말에 이미 거의 1만 명이 되었다.

그러나 국공합작 아래 공산당이 급속히 당세를 확장하고 공산당이 지도하는 대중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국공합작을 계속 지지해온 좌파와 국공분리를 주장하는 우파 사이에 분열이 심화되었다. 1925년 3월 쑨원이 죽은 뒤 분열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여 8월에 우파가 시산[西山] 회의파를 형성했다.

1926년 3월에는 장제스가 공산당원들을 탄압한 중산함[中山艦] 사건을 일으켰다. 1926년 7월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혁명의 당면목표인 북방군벌의 타도, 즉 북벌(北伐)을 개시했다. 북벌은 순조로이 진행되어 국민혁명군은 2개월 만에 후난·후베이를 장악하고, 1927년 3월에는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했다.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부를 난창[南昌]으로 옮기고, 우한으로 옮긴 광둥 정부와 대립했다. 그는 1927년 4월 12일 대대적으로 공산당원을 살해했다. 또한 국민당 우파를 이끌고 난징 국민정부를 세워 우한 정부와 대립했다.

난징 정부가 강화되면서 우한 정부도 동요하다가 7월에 공산당과 결별을 선언했다. 이로써 제1차 국공합작이 끝이 났다.

난징 국민정부 시기

장제스는 4·12사건을 일으킨 후 다시 북벌에 나서 1928년 6월 베이징에 입성했다.

베이징 정부는 무너졌지만 여러 지역에 군벌이 남아 있어 전국 통일을 실현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난징 정부는 산시[山西]의 옌시산[閻錫山], 서북의 펑위샹[馮玉祥], 동북의 장쉐량[張學良] 등의 군벌과 타협하면서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 이들 공동의 적인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국공분열 후 공산당은 인민해방군 건군 기념일인 1927년 8월 1일 난창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장시 성으로 쫓겨갔다. 이때 최초로 홍군(紅軍)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성경(省境) 부근의 오지에 근거지를 건설하고, 이곳에서 1929년말부터 1933년초까지 4차례에 걸친 국민당군의 포위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1934년 가을 경제봉쇄를 겸한 대대적인 공격에 밀려 근거지를 함락당하고 역사적인 장정에 들어갔다. 장시 성을 빠져나온 장정의 대오는 구이저우[貴州]로 갔다가 다시 윈난을 거쳐 쓰촨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부대는 두 파로 갈리어 한 파는 시캉[西康]을 향해 서진하고 다른 한 파는 간쑤[甘肅]·산시[陝西]를 향해 북진했다. 2년에 걸친 장정 끝에 공산당과 홍군은 모두 산시 성 옌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1935년 일본군이 만주를 발판으로 삼아 화북에서 군사도발을 일으키자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이 심화되었다. 중국인들은'먼저 내정을 안정시킨 뒤에 외세를 물리칠 것'(先安內後攘外)을 주장하며, 공산당 토벌에 주력하고 있는 국민당을 비판하여 즉시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단결을 통해 일본군에 대항할 것을 호소했다.

공산당은 코민테른 제7회 대회의 반파시즘 인민전선 전술에 따라 장정 도중인 8월 1일 항일연합군을 결성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할 것을 제창했다.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과 양후청[楊虎城]이 일치항일을 요구하며, 장제스를 구금한 시안 사건을 일으키자 국민당도 정책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이로써 항일을 위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항일전쟁 시기

일본은 1937년 7월 중국에 대한 전면전을 개시하여 빠른 속도로 톈진·베이징을 점령하고 상하이까지 진격했다.

국민정부와 중국공산당은 9월 통일전선 협정을 맺고 홍군을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는 군대로 재편성했다. 주력부대는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화중·화남에 흩어져 있던 게릴라 부대를 통합하여 신사군으로 개편했다. 팔로군과 신사군은 일본군의 배후지역에서 항일근거지를 만들고 유격전을 벌였다. 일본군이 화북의 철도와 주요도시들을 점거하고 이어 광둥까지 점령하자, 국민정부는 난징에서 우한·충칭[重慶]으로 차례로 옮겨갔다.

그뒤 1939년부터 전쟁은 교착상태에 들어갔으며, 곳곳에서 소규모의 산발적인 전투가 있을 뿐 전선의 변동은 거의 없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지구전론(持久戰論)에 의하면 전략적 대치 단계였다. 이 시기에 장제스가 주력한 것은 전후의 통일문제였다. 그는 공산당에 의한 변구(邊區) 정부를 붕괴시키는 데 진력했다. 공산당은 1940년 후반에 소위 백단대전(百團大戰)을 행하고 일본군에 대해 적극적 공세를 폈다.

그러나 1941~42년에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고 군대와 지배지역이 모두 크게 위축되었다. 근거지는 국민정부군, 왕징웨이[汪精衛] 군대, 일본군에게 봉쇄되어 재정경제 상태가 악화되었다.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 1942년부터는 군사공작보다 정치공작에 주력하고, 근거지의 정치·경제를 정비하여 힘의 축적을 꾀했다. 전후의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공산당은 국민당의 일당 지배의 폐지를 요구하고 항일정당 대표로 이루어진 연합정부의 결성을 요구했다.

국공내전

시기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여 중국에서 물러나자 국·공 양당의 군사적인 충돌이 공공연해졌다.

미국은 1944년 이래 중국의 정치에 직접 개입하여 국·공 간의 대결을 피하도록 유도하고 중국의 대일 항전력을 강화시키려 했다. 또 전후의 아시아는 통일 중국이 존재해야만 안정되리라고 생각하여, 일본 항복 후 주중대사와 사절단을 보내 조정을 시도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결국 1946년 여름 전면 내전이 시작되었다. 1946년 후반에서 1947년 전반까지 국민정부군의 공세가 계속되었지만 마오쩌둥은 전세를 낙관했다. 마오쩌둥은, 국민정부군이 공산당의 지배지역에 깊이 침입해 들어오면 국민정부군의 반 이상이 수비부대로 전환해야 되므로, 실전 부대가 감소하여 곧 공산당이 전략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과연 마오쩌둥의 확신대로 1947년 후반에는 공산당이 역공세를 펼 수 있게 되었다. 국민정부군의 주력이 동북·화북·산시[陝西]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된 사이 류보청[劉伯承]과 천이[陳毅]의 야전군이 황허 강과 양쯔 강 사이에 새로운 해방구를 만들었으며, 동북에서는 린뱌오[林彪]의 군대가 도시를 봉쇄하고 농촌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마오쩌둥은 12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특별회의에서 게릴라전을 기초로 하여 인민의 지지를 받으며 수행하는 인민전쟁전략을 명확히 했다.

또한 지주의 토지를 경작 농민에게 나누어주고 독점자본을 국유화하며, 민족 상공업의 활동을 제한적으로 보장한다는 성명을 냈다.

중국공산당은 동북·화북·화동의 농촌지대를 장악하고 난 뒤인 1948년 국민정부가 지배하는 도시지역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해 가을에는 동북지방의 진저우[錦州]·선양·창춘[長春]의 세 도시를 장악했다. 이때 산둥·장쑤에서는 회해전역(淮海戰役)이라는 내전 최대의 전쟁이 벌어져 쌍방 모두 50만 이상의 대군이 참여하는 접전을 벌였다.

중국공산당은 회해전역에서 승리했으며, 1949년 1월 톈진·베이징도 점령했다. 1949년 3월 중국공산당은 제7회 전국대표대회(7전대회) 2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2중전회)를 허베이 스자좡[石家莊]에서 열고 활동의 중심을 농촌에서 도시로 옮기며, 경제정책의 목표를 공업화에 둘 것을 결정했다. 곧이어 중앙위원과 당 기관을 베이징으로 옮겼다. 4월에 공산군은 난하이[南海]·상하이·우한에 입성하고, 그위 서남·화동·화남 지역으로 각각 진격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100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세계사

세계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중국의 현대화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