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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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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

대한민국의 시인, 수필가,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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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감 기사로 근무하면서 한약방을 경영했던 아버지 헌규(獻圭)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한글과 한문을 깨쳤으며 1901년 3살 연상의 현씨(玄氏)와 결혼했다.

1902년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웠고, 1904년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자퇴하고 귀국했다. 이듬해 〈황성신문〉에 투고한 글로 필화를 입어 1개월간 구금되었고, 190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학부 지리역사과에 입학, 유학생 회지인 〈대한흥학회보〉 편집에 참여했다. 그러나 입학 3개월 만에 모의국회(模擬國會)사건에 반발하는 한국인 학생 총동맹휴학으로 중퇴하고, 이듬해 가을 인쇄기를 구입하여 귀국한 후 자택에 신문관(新文館)을 설치하고 인쇄·출판업을 시작했다. 신문관에서 발행한 〈소년〉(1908)은 근대적 종합잡지의 효시이며 후에 이 잡지가 창간된 11월 1일이 잡지의 날로 정해졌다.1909년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설립위원으로 순회강연을 다녔으며, 당시 민족주의자로서 무실역행의 준비론과 계몽주의를 추구했다. 1910년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하여 옛 문헌 보전에 힘썼고, 1911년 〈소년〉이 폐간되자 이어 〈붉은 저고리〉(1912)·〈아이들 보이〉(1913)·〈새별〉(1913)·〈청춘〉(1914) 등의 월간지를 발행하여 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여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가 1921년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1922년 신문관을 해산한 뒤 동명사(東明社)를 설립하여 주간 시사잡지 〈동명〉을 펴내고 이 잡지에 〈조선역사통속강화〉를 연재했다. 이어 1924년 3월 〈시대일보〉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했다가 9월 사임하고, 이듬해 〈동아일보〉의 객원으로 논설을 썼다. 1921년 박승빈과 함께 계명구락부를 만들어 학술지 〈계명〉을 발간했다.

1928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이 되면서 본격적인 친일행위를 했으며 1944년에는 친일 업적이 인정되어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다. 1938년 만주의 어용신문인 〈만몽일보〉 고문을 거쳐, 이듬해 일본이 만주에 세운 건국대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1942년 서울로 돌아와 우이동에 소원(素園)이라 이름 지은 집에서 사료수집과 조선역사사전 편찬작업에 몰두했으며, 이런 학문적 관심은 1943년에 펴낸 〈고사통 故事通〉에 잘 나타나 있다.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의 학병지원을 권유하기 위해 이광수·김연수 등과 일본에까지 건너가 순회강연을 했는데, 8·15해방 후 이런 친일행위로 인해 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다시 동명사를 설립하여 책을 펴냈으며, 6·25전쟁 때는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고문을 역임했다. 1957년 필생의 사업인 〈조선역사사전〉을 집필하다 뇌일혈로 죽었다. 1959년 우이동 소원에 기념비가 건립되었고, 1975년 15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전집이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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