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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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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염근리라고도 하는 청백리는 청귀한 관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품행이 단정하고 순결하며 자기 일신은 물론 가내까지도 청백하여 오천에 조종되지 않는 정신을 가진 관리를 가리킨다.
<고려사>에는 청백리로 유석·왕해·김육석·최석·정운·윤해·최영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청백리는 유교적 지도이념과 주자학적 실천수행의 도에 철저했던 인물들이었다. 1695년에 영의정 남구만이 청백리 초선을 하면서 살아 있는 경우에는 ‘염근리’, 죽은 후에는 ‘청백리’라고 호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청백리 자료로 남아 있는 것은 <대동장고>·<청선고>·<전고대방>·<조선조청백리지> 등이다.

염근리라고도 하며, 고려시대에는 염리로 불렸다. 청백리란 청귀한 관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품행이 단정하고 순결하며 자기 일신은 물론 가내까지도 청백하여 오천에 조종되지 않는 정신을 가진 관리, 즉 소극적 의미인 부패하지 않은 관리가 아닌 적극적 의미의 깨끗한 관리를 가리킨다.

청백리 정신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청렴정신은 탐욕의 억제, 매명행위의 금지, 성품의 온화성 등을 내포하고 있다. 청백리 정신은 선비사상과 함께 백의민족의 예의국가관에 의한 전통적 민족정신이며, 이상적인 관료상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민족정신은 단군 이래 홍익인간적 윤리관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어 삼국시대의 화랑정신, 고려와 조선시대의 구국항쟁, 그후 의병활동 등으로 계승·발전했다.

〈고려사〉에는 청백리로 유석·왕해·김육석(金六錫)·최석(崔碩)·정운·윤해(尹諧)·최영(崔塋)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전고대방 典故大方〉에 219명, 〈청선고 淸選考〉에 186명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청백리는 유교적 지도이념과 주자학적 실천수행의 도에 철저했던 인물들이었다.

1695년(숙종 21)에 영의정 남구만이 청백리 초선을 하면서 살아 있는 경우에는 '염근리', 죽은 후에는 '청백리'라고 호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명종 전후에 이미 청백리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으며, 그 내용에 있어 살아 있는 사람을 청백리라고 부르는 것은 중종대에도 보인다. 또한 염근리라는 명칭은 1552년(명종 7) 기록에서 볼 수 있으므로 그 명칭은 조선 후기가 아니라 전기부터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명종대에 와서 살아 있는 자는 염근리라는 명칭을 붙여 선발하고, 특별한 과오가 없는 한 사후에는 청백리로 녹선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결국 청백리는 이후 공식명칭으로 공인된 것 같으나 구체적인 시기는 확인할 수 없다.

청백리 자료로 남아 있는 것은 〈대동장고 大東掌攷〉·〈청선고〉·〈전고대방〉·〈조선조청백리지 朝鮮朝淸白吏誌〉 등이다. 청백리들이 지켰던 공직윤리는 수기치인이며, 청렴·근검·도덕·경효·인의 등을 매우 중요시했다. 더욱이 이것들은 국가에 대한 사명감, 왕조체제에 대한 충성심, 백성을 위한 봉사정신 등 개인적인 생활철학으로 정립되었고, 나아가 공직자의 윤리관으로 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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