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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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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명나라의 행정제도를 답습하는 한편, 결함을 보완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300만이 넘지 않았던 만주족이 100배의 인구를 가진 데다 사회·경제면에서 휠씬 앞서 있는 한족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국민을 개병(皆兵)으로 한 압도적인 군사력뿐만 아니라, 명나라 관리를 계속 등용하고 항복한 장군에게는 작위를 주는 등의 회유책이 적중했던 듯하다. 그러나 지배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고위 관료의 절반 이상은 만주족이 차지했으며, 전국 각지에 녹영(綠營)을 배치해 지방 반란을 막게 하고 수도와 지방의 전략적 요지에 상비군인 만주족 기병(旗兵)을 배치했다.

군사 및 행정 조직으로는 8기제도(八旗制度)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는데, 황·백·홍·남의 4색기와 각 색기에 천으로 테를 두른 4기를 합한 8기로서 모든 만주족이 이 안에 편성되었다. 정무 집행기관은 이(吏)·호(戶)·예(禮)·병·형(刑)·공(工)의 6부, 대리시 이하의 5시, 도찰원, 한림원(翰林院), 국자감·흠천감(欽天監) 등 기본적으로 명나라 제도를 계승했다. 세제 역시 명나라 말기의 일조편법(一條鞭法)을 계승했으나, 강희제 말년에 인두세가 토지세에 포함되는 등 여러 차례 개혁이 있었다.

강희제(康熙帝:1661~1722 재위)에서 옹정제(雍正帝:1722~35 재위)를 거쳐 건륭제(乾隆帝:1735~96) 중엽까지의 약 130년간을 청나라의 전성기로 본다. 강희제는 만주의 헤이룽 강[黑龍江] 유역으로 진출한 러시아와 대결하여 그들을 알바진의 요새에서 물러나게 했다. 1689년에는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고 만주의 북쪽 국경을 아르군 강으로 정했다.

그후 40여 년 간 몽골의 준갈이부(準喝爾部)를 토벌하는 등 정벌을 계속하여 제국의 영토를 외몽골·티베트·준가얼·투르키스탄·네팔 지역에까지 확장했다. 옹정제건륭제 때는 상업과 수공업이 번창했고, 로마 가톨릭교 선교사들을 받아들였다. 또한 회화·인쇄술·도자기 제조가 번성했으며, 문헌학에 대한 연구도 잇달았다. 그러나 그뒤를 이은 황제들은 인구 팽창과 토지소유의 집중으로 생겨난 문제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심한 홍수와 기근으로 생긴 민중 소요는 태평천국운동(1850~64)과 염군(捻軍)의 난(1853~68)으로 발전했으나 사기가 떨어진 기병은 이를 진압할 능력을 잃었다. 근대화·서구화를 위한 시도는 보수 관료들의 저항에 부딪혔고, 행정관리의 비효율성과 관리의 부패가 확산되었다. 제1차 아편전쟁(1839~42), 제2차 아편전쟁(1856~58), 청일전쟁(1894~95), 의화단 사건(1900) 등에서 잇달아 패배하여 서구열강에게 여러 가지 이권들을 허용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선통제(宣統帝:이름은 푸이[溥儀])가 퇴위하고 권력은 위안스카이[袁世凱] 휘하의 임시정부에게 이양되었다(→ 중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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