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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시대 외국을 경계하여 세운 석비. '대원군 척화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분묘도굴사건, 1871년 신미양요 이후 외국과의 교섭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화강암으로 된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공사의 요구에 의하여 일부 철거되었다. 서울특별시 경복궁, 부산광역시 부산박물관, 경상남도 함양군, 충청남도 홍성군 등에 남아 있다.
정의
조선 시대 외국을 경계하여 세운 석비. 특히 1866년 병인양요 이후 대원군의 지시로 세워진 석비를 뜻하여 '대원군 척화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건립 배경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대원군은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시키려다가 실패한 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여 1866년 9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천 명의 교도를 처형했다. 이에 프랑스는 자국(自國) 선교사의 처벌 등을 문제 삼아 7척의 군함으로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병인양요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침공을 받은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와 화친한 중국이 겪는 폐단을 지적하면서,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서양 오랑캐와 화친한다면 나라를 파는 것이고, 그들의 위협에 굴복하여 교역을 허락한다면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며,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굳세게 싸울 것과 그들의 문호개방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병인양요에서 표출되었던 쇄국양이정책은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분묘도굴사건(南延君墳墓盜掘事件)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미국의 침략을 물리친 후 한층 더 강화되어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겼는데 이것이 척화비이다.
현황
척화비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서울의 종로네거리·강화·경주·부산진·동래군·함양군 등 전국의 주요도시에 세워졌으며, 비석의 높이는 서로 차이가 있으나(부산 180㎝, 서울 135㎝, 함양 120㎝), 넓이(40~45㎝)와 두께(25㎝)는 대체로 비슷하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어 갔을 때 일본공사(日本公使)의 요구에 의하여 일부 철거되었다. 서울특별시 경복궁, 부산광역시 부산박물관, 경상남도 함양군, 충청남도 홍성군 등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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