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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49. 2. 13, 잉글랜드 옥스퍼드셔 우드스톡 근처 블렌엄 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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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5. 1. 24, 런던 |
국적 | 영국 |
요약
젊은 나이에 보수당의 중진으로 활동했으며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이다. 1886년 37세 때 하원의장 겸 재무장관이 되었고 머지 않아 총리가 될 것이 확실시되었으나 자신의 오판으로 그 해가 가기 전에 정치적 생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말버러 공작 7세의 셋째 아들로, 1874년 미국 뉴욕 주 브루클린 출신의 유명한 미인인 자네트(제니) 제롬과 결혼했으며 같은 해에 하원에 들어갔다. 1880년까지 비컨즈필드 백작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정부를 상대로 풍자적 연설 솜씨를 유감 없이 발휘했다. 1880~85년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의 자유당 내각 시기에 다른 3명의 보수당원, 즉 헨리 드러먼드 울프 경, 존 엘던 고스트, 아서 제임스 밸푸어와 합세해 이른바 제4당을 결성하고 '토리 민주주의'라고 선언된 일련의 견해들을 지지했다. 1886년 7월 25일 보수당이 다시 권력을 잡자 그는 재무장관 겸 하원의장이 되었으나, 정부의 실질적인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노골적인 야심 때문에 처칠은 대부분의 동료들과 사이가 멀어졌다. 죽을 때까지 하원에 남기는 했지만 정치에 흥미를 잃고 경마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곧 사직한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일반매독성 진행마비 증세로 정신착란을 겪으면서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젊은 나이에 보수당의 중진으로 활동했으며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이다.
1886년 37세 때 하원의장 겸 재무장관이 되었고 머지 않아 총리가 될 것이 확실시되었으나 자신의 오판으로 그 해가 가기 전에 정치적 생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말버러 공작 7세의 셋째 아들로, 1874년 미국 뉴욕 주 브루클린 출신의 유명한 미인인 자네트(제니) 제롬과 결혼했으며 같은 해에 하원에 들어갔다. 1880년까지 비컨즈필드 백작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정부를 상대로 풍자적 연설 솜씨를 유감 없이 발휘했다. 1880~85년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의 자유당 내각 시기에 다른 3명의 보수당원, 즉 헨리 드러먼드 울프 경, 존 엘던 고스트, 아서 제임스 밸푸어와 합세해 이른바 제4당을 결성하고 '토리 민주주의'라고 선언된 일련의 견해들을 지지했다.
1876~80년에 아일랜드 총독이었던 아버지의 비공식 개인비서를 지내기도 했던 처칠은 아일랜드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전국 차원의 아일랜드 자치안에는 반대했지만 지방 차원의 자치를 지지했으며 1880년대의 아일랜드 위기 당시 영국관리들이 취한 근시안적인 조치를 비난했다. 보수당의 대다수는 아일랜드에 대한 자유당 정부의 억압정책에 동의했으나 그는 찰스 스튜어트 파넬이 이끄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에게 1885년의 총선에서 아일랜드가 보수당을 지지해준다면 보수당은 억압정책에 반대할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일설에는 자유당에서 그같은 약속에 대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치안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고 한다. 이 시기 내내 처칠은 진정한 대중적 호소력을 갖는 새로운 보수주의를 창조하고 당의 중앙조직에 일반선거구 대표들의 세력을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다. 보수당의 원로지도자들, 특히 솔즈베리 후작 3세 로버트 세실은 그의 방식을 거부했으며 1884년 처칠이 전국보수단체연맹의 의장으로 선출되자 당은 분열되었다. 그러나 솔즈베리 경과 처칠이 서로 양보함에 따라 재결합된 보수당은 1885년 6월의 신임투표에서 승리했고 솔즈베리가 총리가 되었다.
이집트 등지의 영국 제국주의 정책을 공격했던 처칠은 인도장관으로 임명되어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1885. 11)을 명령하고 결국 미얀마 전역을 합병했다. 보수당과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의 결별로 보수당이 하원에서 아일랜드의 지지표를 대부분 상실한 이후 1886년 2월 1일 그는 솔즈베리와 함께 직책에서 물러났다.
1886년 7월 25일 보수당이 다시 권력을 잡자 솔즈베리는 처칠을 재무장관 겸 하원의장으로 임명했다.
정부의 실질적인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노골적인 야심 때문에 처칠은 대부분의 동료들과 사이가 멀어졌다. 화해가 불가능해지자 솔즈베리는 처칠이 스스로 좌절을 겪기를 기다렸다. 이 일은 그의 첫번째 예산안에서 벌어졌다. 이 예산안은 병역예산을 감축하는 내용 때문에 육군장관 W. H. 스미스의 반발을 샀다. 1886년 12월 20일 처칠은 솔즈베리에게 재무장관과 육군장관 중 어느 편의 정책을 선택할 것인지를 조건으로 사직서를 보냈다.
총리가 스미스를 지지하자 처칠은 12월 23일 자신의 사직서를 런던의 〈타임스 The Times〉지에 공표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를 기대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 예산싸움이 비밀에 붙여져 있었기 때문에 대중들은 그의 행동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죽을 때까지 하원에 남기는 했지만 정치에 흥미를 잃고 경마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일반매독성 진행마비 증세로 정신착란을 겪으면서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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