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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82(정조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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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50(철종 1)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조인영은 헌종 때 왕실의 외척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남용하는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순조 때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형 조만영의 딸이 세자빈이 되면서 왕실의 외척 중의 하나가 되었다. 순조로부터 순조가 죽은 후에 헌종을 도와서 인도하라는 보도 임무를 부여받았다. 8세의 나이로 헌종이 즉위한 뒤, 순조의 정비인 순원왕후 김씨에 의해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뒤이어 호조판서에 임명되면서 형 조만영과 함께 풍양조씨 가문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기해사옥을 비롯하여 천주교 탄압을 주도했다. 그는 문장과 글씨 및 그림에 모두 능했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경(羲卿), 호는 운석(雲石). 아버지는 이조판서 진관(鎭寬)이며, 형이 영돈녕부사 만영(萬永)이다. 1819년(순조 19)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응교가 되었으며, 그해 형의 딸이 세자빈이 되면서 홍문록(弘文錄)·도당록(都堂錄)에 이름이 올랐다. 1822년 대사헌에 특진되었으며, 1826년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이조참의·대사성·예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829년 세손부(世孫傅), 이어 우부빈객이 되었으며, 순조의 유촉으로 왕세손(뒤의 헌종)을 보도하는 책임을 맡았다. 1834년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즉위한 뒤,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에 의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1837년(헌종 3)에도 특지로 호조판서에 임명되어 형 만영과 함께 풍양조씨 가문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1839년 기해사옥을 통해 천주교를 탄압하고, 우의정에 올라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찬진(撰進)했으며, 1841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1839년 이후 몇 년 간 독상(獨相) 또는 수상(首相)으로 있으면서 정국을 주도했으며, 물러나 있을 때에도 자파의 이해를 대변하는 권돈인·김도희(金道喜) 등을 내세워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하면서 안동김씨 세력에 대해 풍양조씨 세도의 우위를 확립했다. 그는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성리학만이 성인의 길이라고 인식했으며, 국내 정치운영 문제에서는 이이(李珥)와 송준길(宋浚吉)을 모범으로 제시했다.
1816년 성절사(聖節使)의 일행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 청나라의 금석학 대가인 유연정(劉燕庭)에게 우리나라 금석학 자료를 주어 연구하게 했고, 귀국한 후에도 김정희(金正喜)가 발견한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의 탁본과 〈해동금석존고 海東金石存攷〉 등을 보내주어 그가 〈해동금석원 海東金石苑〉을 편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문장·글씨·그림에 모두 능했다. 1847년에는 〈국조보감 國朝寶鑑〉의 찬술에 참여했다. 저서로 〈운석유고 雲石遺稿〉가 있다. 헌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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