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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25년 11월 서울에서 조직된 화요회계의 학생운동단체. 강령으로 사회과학의 보급, 학생의 사상통일, 상호단결 등을 내걸었다. 학술강연회나 농촌강좌를 여는 등의 교육 활동을 중심으로 진행했으며,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운영에 차질이 생기게 되어 1933년 조선학생회에 합류했다.
1925년 5월 사회주의계열 최초의 학생운동단체인 조선공학회가 조직되었다. 북풍회계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공학회는 '사회과학 연구'와 '민중본위 교육'을 주장하면서 활동했는데, 그해 10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조선공학회가 해산되자 북풍회계 학생들은 서울학생구락부를 결성했고, 일부는 화요회의 영향하에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조직했다. 11월 3일 총회를 통해 조직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① 사회과학의 보급, ② 학생의 사상통일, ③ 상호단결, ④ 인간교육본위의 실효, ⑤ 조선학생 당면문제의 해결"을 강령으로 내세웠으며, 산하에 서무부·사업부·도서부·조사부·연구부를 설치했다.
중심인물은 이병립(李炳立)·이천진(李天鎭)·정달헌(鄭達憲)·현운필·이우(李玗)·조돈원·염근용 등이었다. 학술강연회, 농촌강좌, 학생도서관 설립 등의 활동을 했으며, 특히 6·10운동투쟁지도 특별위원회가 일제에 의해 점거되자, 이병립·조두원(趙斗元)·정달헌·권오상(權五尙) 등의 학생지도부가 만세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만세운동의 여파로 회원들이 대거 구속되자 1927년 4월 정기대회를 열어 규약을 수정하고 임원을 개선했다. 이때 선출된 집행위원은 강병도·이현상(李鉉相)·김종린(金鍾麟)·이천진·박일(朴日) 등이었다. 이 시기 조선학생회와 함께 신간회 학생부에 참여하여 1932년까지 활동하면서, 경성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의 비밀결사와 동맹휴학 등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워지자 1933년에는 조선학생회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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