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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의 정당화, 친일파관료 육성·보호와 이를 조선인들에게 선전하기 위해 설치한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 본래는 고종 때 내각의 자문을 맡은 기관이었으나 한일합병 후 성격이 변질되었다. 의장 1명, 부의장 1명, 고문 15명을 포함해 약 약 80명의 구성원이 있었고, <조선반도사>의 편찬을 위한 자료 수집이 주요 업무였다. 이 편찬사업에는 을사5적 중 하나인 이완용 등이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한일합병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하기도 했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조선시대에 있었던 기관을 합병 이후에도 유지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동시에 조선 통치를 더욱 수월하게 하기 위한 친일파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중추원을 이용했다.
개요
본래 중추원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설치되어 다음해 3월 중추원관제급사무장정(中樞院官制及事務章程)에서 내각의 자문기관으로 기능이 규정되었으나, 한일합병 이후는 일제의 조선침략을 합리화하는 친일주구배, 협력자 및 그 추종자들의 집합기관으로 변질되었다.
구조
일제는 조선총독부가 대한제국의 관제기구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을 조선인들에게 인식시키고 분할통치를 위한 의도에서 일제침략에 적극 협력했던 친일파들을 중추원이라는 모방기구에 모아 이용하고자 했다.
1910년 한일합병 직후인 10월 1일 '조선총독부중추원관제'에 의해 조선총독부중추원으로 설치되었다. 이에 따르면 조선총독 개인의 자문기구로 의장 1명, 부의장 1명, 고문 15명, 찬의 20명, 부찬의 35명의 기본구조와 사무행정처리를 위한 서기관장 1명, 서기관 2명, 통역관 3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1915년 4월 30일 개정되어 자문기능 이외에 '구관 및 제도에 관한 조사'역할이 추가되었고, 1918년 1월 19일 실무 부서로 조사과와 편찬과(이후 서무과)를 두었는데, 이후 4차례 관제개정을 했다.
특히 1921년의 2차 개정은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의 분할통치·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중추원을 식민지통치의 선전·홍보 기구로서 활용하기 위해 단행되었는데, 고문을 5명으로, 찬의·부찬의를 참의(參議) 65명으로, 서기관·통역관을 전임 각 1명으로, 부의장·고문·참의 임기를 3년으로 개편했다.
그밖에 수요회와 시정연구회, 구관제도조사위원회 및 사서편찬을 전담하는 조선사편찬위원회가 특별기구로 존재했다.
인원
의장은 총독부의 정무총감이 맡았고, 부의장과 고문은 합병에 공을 세운 대한제국의 친일대신, 관료층, 일본 장기체류인사들이 주로 임명되었다.
초대 부의장은 김윤식(金允植), 고문은 이완용(李完用)·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이하영(李夏榮)·권중현(權重顯)·이용직(李容稙)·송병준(宋秉畯)·이근택(李根澤)·고영희(高永喜)·조중응(趙重應)·임선준(任善準)·조희연(趙羲淵)·이재곤(李載崑) 등이었다. 1912년 김윤식이 면직한 후 부의장에는 이완용·박영효(朴泳孝)·민병석(閔丙奭)·윤덕영(尹德榮)·이진호(李軫鎬)·박중양(朴重陽) 등이 차례로 임명되었다.
고문은 민영기(閔泳綺)·한창수(韓昌洙)·장석주(張錫周)·민상호(閔商鎬)·조민희(趙民熙)·고희경(高羲敬)·이윤용(李允用)·윤치호(尹致昊)·한상룡(韓相龍)·김윤정(金潤晶)·이범익(李範益) 등이 뒤를 이었다. 또한 찬의는 홍승목(洪承穆)·김만수(金晩秀)·남규희(南奎熙)·윤치호·민원식(閔元植)·유맹(劉猛)·박승봉(朴勝鳳) 등 29명이 거쳐갔으며, 부찬의는 정진홍(鄭鎭弘)·조병건(趙秉健)·이봉로(李鳳魯) 등 45명이 차례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비호를 받으며 식민지권력의 상층부를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대지주·대자본가로서 경제적 부를 누렸다.
1920년대 들어 부의장·고문들이 노령화·사망 등으로 기대했던 만큼의 이용가치가 없자, 일제는 찬의·부찬의들을 친일계급으로 육성하여 식민지의 분할통치에 적절하게 이용하는 정책을 취했다.
기능
가장 중요한 기능은 민족동화정책의 일환이었던 취조국과 참사관실을 거쳐 이관된 구관제도조사사업과 〈조선반도사〉 편찬을 위한 기본적 사료의 조사·수집, 관련 책자의 편찬이었다.
특히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은 1915년 7월부터 착수되어 이완용 등 고문 11명을 조사위원으로, 찬의 유정수(柳正秀) 등 15명을 실무자로 선임한 데 이어, 미우라[三浦周行]·이마니시[今西龍]·구로다[黑板勝美]를 편집주임으로 위촉하여 한일합병과 식민사관의 정당성을 강변하려 했다.
또한 식민지에 적용할 법률 제정을 위한 사회·문화 조사활동도 전개했는데, 역둔토·궁장토 및 토지소유권 연혁 조사, 지상권·연대채무·친족관계·상혼(相婚) 등의 조사와 그에 기초하여 구관습을 식민통치법안으로 입법하여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심의를 담당했다. 회의의 소집은 1년마다 1차례씩 정기회의를 했고, 총독의 시정방침 훈시 등이 있을 때 이를 일반 민들에게 선전·홍보하기 위해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정책 자문은 8·15해방 때까지 1건도 없었으며, 대신 식민통치체제의 강화를 위한 각종 조사·편찬 기능만 전적으로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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