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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24년 4월에 조직된 사회주의 청년운동 단체. 중앙집행위원으로 25명이 선출되었으며, 중앙검사위원에는 5명이 선임되었다. 이후 1926년 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 인해 단체는 신파와 구파로 나누어졌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사건으로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지방단체들의 주장으로 인해 1931년 사실상 해체되었다.
1924년 2월 11일 북성회 계열의 토요회·신사상연구회·조선노동연맹회 등이 합작하여 신흥청년동맹을 결성하자, 조선청년회연합회와 서울청년회계 대표 330여 명도 조선청년총동맹 발기준비회를 개최했다. 이 발기준비회는 대중본위의 신사회 건설을 기도하고, 조선민중 해방운동의 선구가 되기를 기약한다는 강령을 발표했다. 서울청년회의 조선청년총동맹 조직준비사업이 진행되자, 신흥청년동맹측은 서울청년회 쪽의 합동제의에 응하여 조선청년총동맹의 발기단체에 가맹했다.
이에 1924년 4월 21일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전국의 사회주의 청년단체들을 거의 망라한 223개 단체 대표 170명이 참석하여 조선청년총동맹창립대회를 개최하고 임원을 선출했다. 중앙집행위원으로는 박원희(朴元熙)·최창섭(崔昌燮)·정백(鄭栢)·이영(李英)·송봉우(宋奉瑀)·한신교 등 25명이 선출되었으며, 한신교·박헌영·강제모 등 5명이 중앙검사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4월 24일 임시대회에서는 청년문제·노농운동·교육문제·민족운동 등 13개 부분의 운동에 대한 방침을 결의했다.
1926년 11월 정우회선언을 계기로 민족협동전선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청년총동맹 내 서울청년회 계열에서도 정우회선언을 지지하는 차재정(車載貞) 등의 신파와 이영·박형병(朴衡秉) 등의 구파로 분립되었다. 신파는 정우회 세력과 전국의 청년조직을 중앙집권적 조직으로 구성한다는 방침하에, 부군(府郡) 단일의 청년동맹으로 개조하여 면에 지부, 이에 반, 도에 협의기관인 도연맹을 설치했다. 1929년 12월 광주학생운동사건으로 중앙 간부들이 대거 체포된 이래 중앙 조직이 급격히 우경화되어가자, 지방단체들이 해소를 주장해 신간회·근우회 해소와 더불어 1931년 5월 사실상 해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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