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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동당

다른 표기 언어 朝鮮勞動黨

요약 1924년 8월 서울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사상운동단체.

전일(全一)·김연희(金演羲)·이남두(李南斗)·이봉길(李鳳吉)·이정수(李正洙)·이충모(李忠模)·이극광(李極光) 등이 참여했다. '무산노동자의 단결을 도모하여 공산주의적 신사회 건설을 기도함'이란 강령을 발표했고, 서무부·노동부·문화부·조사부 등 4개 부서를 두었다. 기관지로 〈프롤레타리아〉를 발간하려 했으나, 그해 11월 이르쿠츠크와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의 공산주의자들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던 전일·문일현(文一鉉)·이동익(李東益)·이남두·이극광 등이 체포되는 조선노동당사건이 발생하여 무산되었다.

조선노동당은 서울청년회와 북풍회·화요회 연합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1925년 1월 3일 고려국(코르뷰로) 국내부의 지시에 따라 화요회·북풍회가 주도한 재경사회운동자간친회에 참여했다. 종래 두 그룹의 경쟁에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던 조선노동당이 화요회·북풍회 연합진영에 가담하자, 서울청년회의 김사국(金思國)은 조선노동당을 통해 북풍회·화요회 연합세력에 타협을 제의했다. 이에 조선노동당은 각 파에 사회주의 운동을 통일시키기 위해 전조선사회주의운동자대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으나, 북풍회·화요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에 조선노동당은 1925년 3월 16일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응원회에 참여하면서 북풍회·화요회 연합 지지라는 자신들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산하의 압력단체인 급수부조합(汲水夫組合)·의권단(義拳團) 등을 동원하여 서울청년회의 압력단체인 적박단(赤雹團)과 대결했다. 그해 4월 조선노동당은 화요회·북풍회·무산자동맹과 결합하여 4단체합동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조선노동당사건 때 검거를 피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던 이정수·김덕한(金德漢) 등이 1925년 7월 귀국하여 4단체합동에 반대하면서 조선노동당은 합동파와 비합동파로 양분되었다. 이후 비합동파는 따로 떨어져나갔으며, 합동파는 4단체합동위원회에 참여했다가 1926년 4월 14일 정우회에 참여함으로써 발전적으로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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